구미정
미팅 한번 못해보고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자랑일까, 흉일까? 마찬가지로 채팅 한번 못해보고 네티즌이라고 우기면 자랑일까, 흉일까?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다는데, 정보 화 시대에는 그 말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하루라도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손에 쥐가 난다"고. 언제부턴가 컴퓨터가 무서운 속도로 우리네 삶을 파고들면서 일상생활 전반이 컴 퓨터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끔씩 급한 업무 때문에 PC방에 들러 보면, 퀘퀘한 담배 연기 사이로 충혈된 눈을 비벼가며 머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미래의 '쌈장'들을 만난 다. 이제 갓 10대에 진입한 그들의 관심과 언어와 세계가 너무나 낯설고 서먹해 때로 등줄 기가 시린 느낌을 받는다.
컴퓨터가 장안의 화제로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것의 중립적 가치에 결론이 모아지 곤 했다. 컴퓨터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니까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선하게도 또는 악하게 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을 둘러싼 각종 범죄와 부작용을 보노라면, 컴퓨터로 대변되는 첨단과학기술 전반의 가치중립성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 의심은 생명 없는 기계를 다루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불신인지도 모른다.
맨 처음 압력솥에 밥짓는 법을 배울 때 엄마는 덜렁대는 나를 붙잡고 단단히 경고했었
다. 압력추에서 김이 다 빠지기 전에는 절대 뚜껑을 열면 안돼, 만약 그랬다가는 폭발해, 그
러니 제발 조심해... 삶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압력솥이 생각난
다. 그리고 엄마의 간절한 당부도 함께 메아리친다.
내면에 알지 못할 분노와 실망과 좌절과
패배의식을 가득 담고 터질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그들에게 엄마같은 심정으로 말을
걸고 싶다. 하지만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무언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고 싶은데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압력추를 잃어버린 압력솥처럼, 어디에서도 자기 안의 폭발하는 파괴에너
지를 발산할 아울렛을 찾지 못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
라고? 삶의 어두운 면만 보지말고 밝은 면을 보라고?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어떤
말로도 그들의 상처입은 영혼을 어루만져주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다.
그러나 한마디, 이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클릭하여, 자살에 성 공하기 위한 각종 정보를 얻고, 거기에다가 덤으로 함께 죽음을 맞이할 동반자까지 구하는 일은 생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모욕적이다.
성공하지 못한 자살은 성공한 자살보다 더 끔찍하다고 한다. 이 말은 자살 미수자에게 미칠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상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살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집안에 자살자 혹은 자살 미수자가 있으면 무슨 페스트 환자를 대하 듯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 6세기경에 자살을 금지하는 교회법이 생기면서부터 자살자는 중죄인으로, 자살 미수자는 정신병자나 망신거리나 인생 낙오자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곱씹어 보면, 더 이상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무의미해서, 너무 힘에 부쳐서, 서둘 러 죽음을 앞당기는 것만이 유일한 아울렛이라고 결론지어서 자살 사이트를 서성대는 이들 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한번쯤 자살을 꿈꾸어보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더러는 용기 가 없어서, 더러는 신앙 때문에 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마 치 샴 쌍둥이처럼 서로 붙어있는 모양이다. 예외도, 예고도 없이 맞이하게 되는 생사의 갈림 길은, 그래서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해진다.
자살률은 사회적 건강을 측정하는 하나의 척도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자살 사이트가 판치고 또 그런 기류에 휘말려 동반자살이 유행하고 심지어는 중학생들 사이에서도 자살게 임이 번진다는 소식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고로 자살은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둔감하였다는 점에서 그 공동체에 속한 동시대인 모두는 간접적인 의 미의 자살 방조자 내지는 공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지금도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영혼의 마지막 아울렛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면, 잠시 숨을 돌리고 영화 한편을 함께 보자고 말하고 싶다. 바로 알 파치노 주연의 "여인 의 향기"다.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은 주인공이 자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삶에로 돌아서는 내용인데, 무엇보다도 내 눈물샘을 자극한 대목은 주인공이 카페에서 한 여성에게 탱고를 가르치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자꾸 스텝이 엉켜 춤을 그만 두려고 하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 한다. 음악이 계속되는 한 춤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때로는 발이 엉키고 넘어질 뻔 하고 리듬을 놓치고 호흡이 안 맞아도 끝까지 추어야 하는 게 탱고라고.
인생이란 탱고를 추는 것이다. 음악이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가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 생명을 낳고 돌보고 거두어들이는 하느님의 우주적 춤이 계속되는 한, 우리도 그 춤의 일부 가 되어 열심히, 신나게 스텝을 밟을 일이다.
자살의 유혹과 충동이 아무리 커도, 일단 한번 김이 빠지면 그것은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한 자양분으로 승화될 수 있다. 다시 느린 호흡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김을 빼줄 압력추가 의외로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삶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 구미정 (기독교 윤리학 박사, 협성대, 목원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