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바라보며 (2001. 5)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구미정


모두들 입을 모아 "못 떠나는 게 한이지, 능력만 된다면야 왜 못 나가냐?"고 항변한다. 바로 최근 불 고 있는 탈(脫)한국 바람을 일러 하는 말이다. 이 땅의 교육현실을 인내하지 못해 '가족 해체'도 불사하 고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나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학이나 해외 근무, 교환교수나 외국 주재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아내와 자녀들은 남겨둔 채 가장 혼자 들어오는 경 우는 그동안에도 허다했다. 하지만 최근의 추세는 고소득층 사이에서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그 뒷바라 지를 위해 아내마저 외국에 보낸 채 혼자 자취 생활을 하는 외기러기 아빠들이 눈에 띄게 불어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칭 "한총련"(한시적 총각들의 모임)으로 불린다. 한총련에 끼려면 최소한 연봉 4 천만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외국에서 생활하는 자녀들의 학비며 생활비가 조달되고, 본인의 최저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자기는 설령 '마이너스 통장'으로 연명하면서 단칸방에 살지언정 자녀들만큼은 여유로운 자연경관과 자유스런 교육환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게 이 '맹부'(孟父) 아빠들의 소망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가스실' 같은 교실에서 질식당하는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용단을 내렸다고 한다. 자기는 돈 벌어다 바치는 '기계'로 전락해도 좋고 자취생 노릇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으니 자녀들만큼은 영어라도 번듯하게 배워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항변한다.

외기러기처럼 홀로 남아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는 맹부 아빠들을 보노라니 소설 「가시고기」가 떠올 라 눈물겹다. 그러나 한편으론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들의 말에도 일리 는 있다. 서태지가 "교실 이데아"에서 정면으로 고발했듯이, 그리고 영화 "여고괴담"에서 그 현실이 리 얼하게 그려졌듯이 이 땅의 공교육은 위기에 놓여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사교육비를 대느니,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차라리 외국에서 교육시키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왠지 꺼림칙하다. 나에게는 그렇게 뒤를 팍팍 밀어줄 연봉 4천만원짜리 아버지가 없어서일까?

아니,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오히려 개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자괴감 내지는 열등감에 운명 론적으로 사로잡히게 만들어 패배의식을 부추기는 것이 자본주의의 음모임을 알아야 한다. 본래 운이 좋던지(부모를 잘 만나), 아니면 어쩌다 한탕 보기 좋게 터져서 돈방석에 앉은 사람 빼놓고 이 땅 민초 의 아들딸로 태어나 하루하루 성실하고 투명하게 살아서 고소득자로 신분상승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까?

9년째 소방관 생활을 해도 연봉은 고작 2천만 수준이다. 지난 3월에 홍제동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 6명이 보상금으로 받은 액수는 5129만원에서 1억 5669만원이 전부였다. 소방차 1대당 평균 탑승 인원은 일본이 5명, 미국이 5-6명, 영국이 6명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2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원은 이 처럼 턱없이 부족한데, 주당 84시간씩이나 근무하는 우리 소방관들에게 한달치 위험수당으로 쥐어지는 금액은 겨우 2만원밖에 안된다.

문제는 결코 자식을 해외에 보내고 싶은데 보낼 돈이 없는 이런 보통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교육비가 이만큼 올라간데 기꺼이 공헌해 놓고 이제 와서 그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차라리 유 학을 보내겠노라고 궁색하게 변명하는 현재의 엘리트 지배계층에게 문제가 있다. 공교육의 붕괴를 탓할 일도 아니다. 해외로 유출되는 그 막대한 교육비의 일부나마 이 땅의 학교를 살리는데 투자하겠다는 갸 륵한 마음씨를 갖지 못한 그들, 아니 우리의 책임이 크다.

누군가 운 좋은 소수가 희망을 찾아 떠날 수 있을 때, 남아있는 다수는 여전히 절망 속에 허덕여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병폐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저마다 희 망이 없어서 떠난다고 야단이다. 우리나라 30-40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이민 열 풍도 '희망 찾기'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내 희망을 찾기 위해, 그러한 희망의 싹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절망의 무게만 더 얹어 주는 것은 악순환을 낳을뿐더러 가혹한 일이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반생태적 죄악이다.

대우자동차 식구들은 하루 아침에 1750명이 해고당했다. 졸지에 해고 노동자가 되어 거리로 내몰린 아버지들에게는 어쩌면 자녀들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아이들이 여전히 기죽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이 넉넉하다고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한 믿음에 누가 돌을 던지랴?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대원칙이다. 그런데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저 짓밟히기 전에 먼저 살 궁리부터 하는 게 상책이라고 한다. 가진 자 들은 떠나고, 없는 자들은 오늘도 대책없이 '가스실'같은 교실로 향한다. 올해 교원을 추가 증원하려던 교육인적자원부의 계획이 무산되어, 경기도에서만 352개 초등학교 교실의 1만 4천여 어린이들이 담임 없는 학교에 배치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콩나물 교실,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서로 부대껴야 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함께 질식당하고 있다.

"모두의 일은 아무의 일도 아니다"라는 통념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모두의 일이라면 모 두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한 사람이 내딛는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이 내딛는 한 걸음에 진정한 사회개혁과 진보가 있다는 소박한 생태학적 지혜가 그립다.


* 구미정 (기독교 윤리학 박사, 협성대, 목원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