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숭 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날을 잘 세면 지혜의 마음이 생긴다는 말씀, 우리 모두 다시 생각해 볼만한 대목입니다. 이 지혜의 마음은 온 생명, 곧 어떤 차별도 넘어서 생명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서에는 창세기의 원제목이 “한 처음부터” 라고 되어있고 바로 그 세상의 처음부터 첫째 날, 둘쨋 날 하면서 날을 세는 것이 나옵니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모든 것이 쉬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일할 때 일하고 쉴 때가 되어 만물이 안식을 얻도록 한다면 지혜의 마음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성서에 또한 명절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강조점을 둔 기념일이 있는가하면 농사절기와 관련이 있는 명절이 많습니다.
절기를 잘 세어서 지키는 정신은 첫째는 애굽의 종살이하던 자신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요 둘째는 종살이의 아픔을 잊지 말아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로 대표되는 어려운 백성을 돌보는 공동체의 복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명절은 각 개인이나 가정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희년의 기본정신이며 이 축제에서는 공동체의 영역을 성안에서 함께 거하는 외국인들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달력은 음력과 양력이 섞여서 쓰이기 때문에 매번 명절의 날짜가 바뀝니다.
올해도 우리의 새해 달력을 받아들었습니다. 이미 양력과 음력을 잘 세어서 명절과 국경일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달력은 양력의 개념만 있었습니다. 음력명절은 공식적인 명절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옛날 노인들이나 아니면 시골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필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제사를 모시는 집안에서나 필요로 하는 것으로 숨듯이 몹시 난처하고 어정쩡한 가운데 지켜지곤 했습니다. 신식 집안에서 특히 기독교 집안은 이 음력명절을 불편해 하고 애써 참여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중과세를 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거라고 양력만 지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음력명절인 설날과 추석은 그 정신이 매우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설날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날입니다. 만물이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여 생명을 내는 출발의 날을 일년 단위로 다시 상기하는 좋은 날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초의 하나님과 생명을 이었고 이 땅에 먼저 사시다 가신 어른들도 생명의 띠로 이어진 나와 하나임을 새기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먹거리를 내는 흙과 바람과 물과 벌레와 자연 그리고 지구가 생명의 띠로 하나인 것을 찬양하는 날이 음력명절입니다. 부여의 동맹, 고구려의 영고 신라의 가배 등은 마을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리고 그 마을 부락민 모두가 가난하든, 부자든 함께 나와 즐기고 마을의 안녕을 빌던 부락제 풍습이었습니다. 세시풍습도 서로 공동체가 나누는 풍습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미신으로 취급받는 풍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을 함께 나누고 적선의 방법으로 먹을 것을 전하고 부녀자와 일꾼들을 해방시키고 하루만이라도 자유를 주자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서양의 공휴일과 아주 차별성이 있는 음력 명절은 참으로 귀한 우리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명절과 호주제를 무관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생명공동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던 명절의 축제가 본래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상에 대한 제사인 유교의 차례가 명절행사에 들어가면서 명절은 혈연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날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나 불교 등은 종교의식과 예배를 관장하는 성직자 그룹을 따로 구별하여 둡니다. 그러나 유교는 각 가정의 남성가장이 성직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여 가부장주의를 강화하며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교의 전통은 철저한 가부장주의로 인하여 남성들을 명절과 차례의 주인 즉 제사장이 되도록 하여 여성들은 철저하게 명절에서 소외시킵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결국은 명절의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한 남자의 핏줄의 뿌리를 찾는 귀향의 행렬만이 긴 꼬리를 잇습니다.
기독교는 이 음력명절의 생명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을 부여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 가정의 남성제사장들에게 가족적이며 개인적인 날로 명절을 내어 맡겨 버렸습니다. 명절을 생명공동체적인 하나님의 날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철저하게 호주제를 정리해 주어야 합니다.
명절에서의 가족개념은 몇 대조 할아버지부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명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생명의 띠로 이어진 모든 이웃이 나와 한 가족임을 깨닫는 감수성을 갖는 날이 명절입니다. 호주제를 버리고 생명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생명공동체만을 생각하는 날이 명절이어야 할겁니다. 그래서 명절에 비는 안녕과 복은 한 가족의 물질의 복을 넘어서 사회적인 복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되는 것일 겁니다.
* 이 숭 리(새문안교회 권사,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예배반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