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현 자
뉴스시간에 TV를 켤 때마다 오늘은 또 무슨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 일순 간 스치고 지나간다. 요즘 단연코 많은 것은 은행 털이 범죄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은행금고 안의 돈 다발을 낚아채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뉴스도 많이 듣다보니 만성이 되어 그리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연 전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해짐을 느낀다. 한 지방도시에서 일어난 술집 화재사건이었다. 대낮에 일어난 사건에서 15명의 여자종업원이 숨졌다. 그 사건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들이 쪽 방에서 노예 같은 감금생활을 하다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작성했다는 취업각서는 다름 아닌 노예각서였다. 사후에 발견된 한 일기장에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빛이 그립다. 이 좁은 공간이 답답하다’ 라고 썼다. 이런 사건은 다른 도시에서도 일어났고 그 때마다 경찰의 감시가 소홀했다고 잠시 법석을 떨다가 잠잠해지곤 했다. 인신매매자의 눈에는 여아와 젊은 여자들이 사람이 아니라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으로만 보인 것 같다.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이 이렇게까지 악해 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절망감마저 생긴다.
얼마 전에 TV에서 소개한 책 가운데 [이타적 유전자]라는 것이 있었다. 영국의 사회생물학자인 메트 리틀리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갖고 있는 유전자는 인간의 본성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주는데 유전자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서 복제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밑바닥에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리잡고 있지만 목적달성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는 이타적 유전자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도덕도 생기고 협동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악인도 많지만 선한 사람도 있고, 나라끼리 전쟁도 하고 경쟁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세계평화, 인권옹호를 부르짖고 한 사람 안에서도 선과 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했다.
악을 택하는가, 선을 택하는가, 사람에게 이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선인들만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적으로도 그렇고 인류문명은 이 선과 악의 싸움 속에서 진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조화와 균형, 인류는 영원히 이 두 가지의 숙제를 안고 나아가고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평등만 강조한 결과 (실상은 일부 소수만 특권을 누렸지만) 자멸을 가져왔다. 지금의 시대는 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더 치열하고 잔인하다.
물질만능주의와 출세주의의 사회분위기, 경제일변도의 정책이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일등국가 (요즘은 중심국가)가 되어야 하고 일등기업이 되어야하고, 일류대학이 되어야하고, 반에서 일등을 해야하고, 인류가수, 일류선수가 되어야하고…. 나라, 개인 할 것 없이 모두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 뒤지면 안 된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풍토는 사람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을 추구하게 만든다.
누군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다시 썼다고 한다. 빨리 뛰는 토끼가 잠자는 동안 느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움직여 이겼다는 익숙한 이야기를 고쳐 쓴 것이다. 빠른 토끼가 속도를 내어 달리다보니 거북이가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옛 이야기와 다른 점은 앞서 가던 토끼가 거북이를 기다려 같이 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토끼가 깜박 잠이 든 것은 같은데 이번에는 그 동안 따라잡은 거북이가 잠든 토끼를 두고 가지 않고 깨워서 사이좋게 같이 갔다는 것이다.
동화의 세계에서 뿐 아니라 인간세계에서도 이것이 가능할 순 없을까. 경쟁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서로 돕고,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사회,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과 양심의 힘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 김 현 자 (YWCA 명예연합위원, 전 국회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