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미 정
대형할인마트에 엄마 손을 붙잡고 나온 어린 사내아이가 장난감 진열대 앞에서 ‘땡깡’을 부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엄마, 저거 사줘, 잉～. 텔레비전에서 본 거하고 똑같이 생긴 저거 말야. 어?” 재촉하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아파치 헬기.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침공 당시, 이라크 하늘을 수놓던 미군의 공격용 헬기다. 젊은 엄마는 “너, 저렇게 생긴 비행기, 집에 많이 있잖아? 고만 사자. 엉? 착하지?” 아이를 얼러보지만, 결국 아이의 막무가내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아파치 헬기를 집어든 아이는 ‘위풍당당 군인’이 되어 할인마트를 나선다.
[제3의 물결]을 쓴 앨빈 토플러를 몰라도 좋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린 그의 이론은 모를지언정, 오늘날 미디어의 영향력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아니, 미디어의 가공할 위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난 3월 20일에 발발하여, 엄청난 인명피해와 문화재 파손, 그리고 민간시설 파괴를 낳고서 한 달여 만에 마무리된 이라크 전쟁을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손에 잡힐 듯이 보고 들었다. 방송사들마다 소위 3D입체영상시스템을 동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이라크 전쟁을 ‘알기 쉽게’ 재현, 마치 우리가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실감나게 전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이러한 미디어의 효과가 곧바로 컴퓨터 게임시장에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판매량의 급증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이라크전과 상황설정이 흡사한 <커맨드앤커커>라는 게임은 특히 이라크전이 진행되던 당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게임매장마다 연일 판매율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1990년 걸프전을 배경으로 한 <컨플릭트: 데저트 스톰>이나 델타포스부대의 활약상을 그린 <레인보우식스: 레이븐 쉴드>같은 게임 등이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디아블로>같은 스테디셀러 게임과 더불어 ‘잘 나가는’ 전쟁게임들이다.
단순한 권선징악의 논리에 익숙해 있는 아이들에게, “승자=선”의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건 아니며, 또한 “승자=우리 편”이라고 섣불리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현실 원리를 이해시키기에는 너무나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호황을 누린 분야가 다름 아닌 컴퓨터 전쟁게임과 미국의 장난감 회사라는 사실은 여간 당혹스럽지가 않다. 미국의 하스브로(HASBRO) 등 유명 장난감 회사들은 미군 당국과 손잡고, 이라크전에서 사용된 신형 무기를 본뜬 전쟁 장난감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른바 ‘군수산업’의 대열에 장난감 회사들도 끼워 주어야할 판이다. 싸우는 아이들에게는 “너, 커서 뭐가 될래? 깡패가 되려고 쌈박질이야? 말로 해야지, 왜 주먹질이냐?” 잘도 훈계하는 어른들이, 막상 국제분쟁에서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해결책을 쉽게 취하는 것도 부끄러운 마당에, 이제는 한술 더 떠 아이들에게 전쟁 장난감을 팔아 제 배를 불리고 있으니...
싸우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알게 모르게 폭력을 대물림하게 되듯이, 전쟁을 보고 자란 세대는 그만큼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희박해지고 ‘힘이 곧 정의’라는 그릇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될 것이다. 어릴 때 운동장에서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의례 등 뒤에 면도칼 같은 걸 숨기고 살금살금 접근하여 잽싸게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던 남자애들이 있었다. 그들이 재미삼아 그랬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여자친구에 대한 반어적 표현으로 그랬는지, 혹은 영웅심으로 한번 그래본 건지 의도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건 그러한 도발적인 행위로 인해 즐겁던 여자애들의 기분이 삽시간에 ‘잡치고’ 평화롭던 놀이판이 순식간에 깨졌다는 사실이다. 서너 살배기 아주 어린 꼬맹이들 사이에도, 열심히 블록 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틈에 터벅터벅 다가와, 애써 쌓은 블록을 천연덕스럽게 무너뜨리고 마는 그런 폭력적인 아이가 반드시 있다. 한마디로 평화 감수성이 빵점인 아이다.
우리는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전시 세대들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으로 이 땅은 허리가 잘린 채 동강나 있고, 하루에도 40여건의 크고 작은 전쟁들이 발발하거나 진행중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인간관계의 해법마냥 자조적으로 통용되는 시대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폭력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인간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선택하는 한, 지구에는 미래도, 희망도 있을 수 없다.
12년 전, 다섯 살의 어린아이로 부모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면서 걸프 전쟁을 지켜보았던 “핼리”(Halley Angela Brooks 17)의 시를 읽어본다 :
나는 까맣게 된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어린 눈들을 기억한다 / 눈물이 글썽이는 어린 눈들… / 잠자다가 폭발의 굉음을 듣고, /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 나야 그나마 행운아다. / 나는 잠자다가 갑자기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 50살쯤 되는 남자들을 안다. / 그들은 아내를 때리고 아이를 학대하고 술에 늘 취해도 / 어디에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다. / 그들에게 원수가 도처에 있고, / 그들에게는 죽음이 도처에 있다. / 우린 그들을 ‘전쟁의 영웅’으로 부른다!
이 시에서 전쟁의 희생자는 비단 패전국의 사상자들만이 아니라 승전국의 전쟁 영웅들도 포함된다. 전쟁의 진면목은 이렇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패-패 패러다임’이다.
이제 우리가 ‘승-승 패러다임’을 구현하려면 길은 하나뿐이다. 어려서부터 의도적으로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지향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감수성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시민단체가 시도했던 “전쟁 장난감 바꾸어주기 캠페인”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어린이들이 무기류 장난감이나 전쟁 게임CD 등을 가지고 오면, 꽃, 화분, 책, 문구의약품 등으로 교환해주는 행사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려는 게 행사의 취지였다고 한다. 그런 행사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전국 교회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평화교육의 산실로 거듭나는 것도 시기적절한 일일 것이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미가 4:3) 그 날을 앞당길 책임이 교회에, 아니 크리스천에게 있다고 하면 잘못일까? 6월을 전쟁의 달이 아니라 평화의 달로 가꾸어나갈 역량있는 피스메이커의 등장이 아쉽다.
* 구 미 정 기독교윤리학 박사, 대구대 필휴먼생명윤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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