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침대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여섯 사람이 누워 있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성장한 한 사람 안에 부모의 영향이 그만큼 크게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형제와 친척, 이웃은 물론 동네와 학교의 자연, 사회 환경의 영향도 작지 않다. 더 나아가 그 집안과 지역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도 심대하다. 이렇듯 상호작용을 하는 숱한 관계망 속에서 한 인격의 고유함이 서서히 성장해 간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면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격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한 사람에게서 그 세계를 느낄 수 있는가? 정작 본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그 요인들을 알아차리고 있는가? 감춰져 있는 그 어마어마한 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가?

천주교를 믿으면서 ‘천주 天主’는 하늘의 주인이란 한자말이겠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런데 정작 알고 보니 이 단어는 본디 제석천을 가리키는 중국의 불교 용어였다. 제석천의 원뿌리는 인도의 인드라 신이고. 1580년대에 일본과 중국 명나라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하느님을 뜻하는 라틴어 ‘데우스’의 번역어로 이 단어를 처음 선택한 뒤 널리 퍼졌다. 한국에서는 이 단어가 한역 서학서를 통해 그대로 들어와 천주교회의 하느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일본 교회에서는 이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과 병행해 쓰고 있다. 신앙의 내용과 표현이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는데, 한 문화권에서 독특하면서도 미묘한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는 신앙 단어가 나타나려면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까? 천주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교와 유교 문화권이었던 한중일 삼국에 처음 들어올 때 어떻게 해당 문화와 소통하면서 정착하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개념어에는 자체의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다. 성경의 용어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히브리어는 천상의 언어이고 하느님의 계시가 글자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고고학적 발굴로 고대 근동 문화가 대대적으로 드러나면서 히브리어 역시 셈어의 한 갈래일 뿐이고, 구약성경 역시 고대 근동 문화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음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신비감이 사라지면서 구약성경의 가치와 권위도 흔들렸다. 게다가 성서 비평학이 발전하면서 구약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더욱 뒤흔들었다.

시골에 살 때 놀라웠던 점 중 하나, 송아지가 태어난 뒤 얼마 안 되어 비틀거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자연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사람은 태어난 지 1년쯤 되어야 겨우 일어나 뒤뚱거리며 걸어갈 수 있다. 문화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고대 이스라엘 종족이 근동 세계에 출현한 때는 기원전 13세기이다. 그들이 정착하던 팔레스티나 지역에는 이미 기원전 삼천년기부터 형성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물론 가나안 문명이 탄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농경을 시작한 신생 약소민족이 주변의 선진 농경문화에 깃든 종교 문화를 시나브로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자신들의 삶과 믿음을 노래와 이야기로 표현할 때에도 선진 문화의 각종 양식을 활용하였다. 모방과 습합은 배움의 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흘러가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남 유다의 멸망이라는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비로소 깨어난 유다의 신앙인들이 자기네 종교문화를 환골탈태했다. 그들은 그간의 전승과 문헌들을 수집하고 야훼(여호와) 유일신 신앙의 견지에서 재해석하여 새롭게 쓰면서 구약성경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옛 주변 문화의 영향을 많이 지웠지만 어떻게 모두 없앨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구약성경을 쭉쭉 읽어갈 때에는 이슬신, 불의 신, 삼촌신, 엄마신 등 단어 사이에 숨어 있는 갖가지 신의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옛 근동 문화도 잘 모르는 데에다 그 자취마저 희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근동어 전문가인 주원준 박사가 고대 근동 언어와 문화로 훤히 비추며 구약성경을 꼼꼼하게 헤집어 주면 그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니 이런 뜻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에서 발견한 고대 근동 신화와 언어의 흔적들’이라는 부제를 붙인 "구약성경과 작은 신들"이 그 작업의 결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 자체가 무척 흥미로울 뿐 아니라, 흘려보던 단어의 기나긴 배경을 알게 되면서 성경 본문을 한층 세심히 살피게 된다. 덤으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독특한 믿음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애쓴 수고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구약성경의 형성 과정까지 더듬어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의 힘겨운 분투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며 소통하고 있는지 또한 성찰할 수 있는 빛을 받는다.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경전의 언어가 너무나 달라 이해와 소통이 쉽지 않은 한국의 교계 현실에서 섣불리 가톨릭 서적을 권유하기는 늘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햇순의 독자는 열려있기에 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의 노작 勞作을 기쁘게 추천하고 싶다. 하느님 말씀은 다채롭고 풍요하다.

『구약성경과 작은 신들』
주원준 지음,
성서와함께 발간,
2021년, 260쪽.

같은 지혜가 아닌 서로 다른 지혜가 성경에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저자는 지혜를 잠언의 규범적 지혜와 욥기,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은 단순히 지혜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심지어는 지혜와 지혜가 갈등하고 대결하며 하나의 지혜는 다른 하나의 지혜를 부정하는 제로섬게임을 하는듯한 인상마저 심어 줍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이 낯선 독자들은 아마도 이 책이 조금 불편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대로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촉매제로 작동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지혜는 규범적 지혜 하나뿐이었습니다.

규범적 지혜의 신앙생활이란 비교적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인과응보 사상을 따르면 그만입니다. 이런 패턴이 지속되고 반복된다면 신앙은 투자나 거래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처럼 보상 없는 신앙을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반성적 지혜는 던지는데 이 말은 곧 신을 인간의 인식론적 영역으로 가둘 수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된 욥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악한 사람이 벌을 받기는커녕 승승장구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사를 지켜보다 보면 평소 가지고 있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로 시간을 돌리면 그때를 감히 누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절대 주권과 섭리와 계획은 불가지해 영역으로 존재합니다. 모름 앞에서 정직한 반응은 침묵뿐입니다.

그 무게는 좀처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알 수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설명되지도 설득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반성적 지혜입니다. 내일 없이 여기에 묶인 인간이 비로써 외로운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길은 모름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반성적 지혜뿐입니다.

이 지혜는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넘어뜨리고 절망에 빠뜨리기도 할 것입니다. 욥의 깊은 탄식이 벌써부터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당신과 가까이 계십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잠언-욥기-전도서의 상호작용
(더바이블 인사이트 1)
송민원 지음, 감은사 발간
20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