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고해 苦海라고도 하고, 세상은 변형된 밀림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서 늑대이다/ homo homni lupus’라고 말한 사람은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입니다. 기술 문명은 고도화되어 끝을 상상하기 어려운 진전을 이루고 있는데, 삶은 조금도 녹록지 않습니다. 지난 연말에 시작된 코로나 19는 또다시 해를 넘길 기세입니다.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정신이 약간 나간 아가씨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동막골’의 한 대사 臺詞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민군 군관이 동막골 촌장에게 묻습니다. “고함 한 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는 영도력의 비결이 뭡니까?” 그러자 촌장이 힘도 들이지 않고 한마디 합니다. “뭐를 좀 마이 멕여야지..”라고. 그렇습니다! 쌀독에서 인심 나고, 배가 불러야 잠이 오는 법이라던가요. 그렇지요! 그가 누구든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어쩌면 제1의 당면과제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제1의 당면과제보다 더한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일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인간다움-사랑, 배려, 사귐, 이해-에도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질본의 경고 문자는 주변 사람을 바이러스 덩어리거나 매개체로 보도록 강요합니다.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순간 긴장하는 주변의 눈빛을 받아내기가 버겁기만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도 눈인사만 할지, 주먹이나 팔꿈치를 갖다 댈지 아니면 악수를 할지 그야말로 백팔번뇌 百八煩惱구입니다.

그렇게 악수를 하고는 얼른 화장실을 향하게 됩니다. 어쩌면 바이러스에 범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손을 닦기 위해서. 최근 한 일간지에는 ‘코로나에 걸린 것보다 주변에 알려지는 게 더 무섭다’는 코로나 실직자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코로나로 일순간에 직장도 친구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희생자라는 생각은,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가슴에 냉풍이 붑니다. 배고픔을 이기게 하고,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은 인간다움의 배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서운 시대입니다.

듣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전투를 한바탕 치르고 나서 다친 병사 하나가 애타게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군종목사 한 사람이 물이 조금 남아 있던 수통을 그 병사에게 건넸습니다.
병사는 무심코 그 물을 마시려다 모든 소대원의 눈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목이 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 병사는 목이 마른 것을 참고 그 수통을 소대장에게 넘겼습니다.
소대장은 그 수통을 받아들더니 입에 대고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부상병에게 다시 그 수통을 돌려주었습니다.
부상한 병사가 물을 마시려고 보니 수통의 물은 조금도 줄어있지 않았습니다.
부상한 병사는 수통을 입에 대고 소대장처럼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맛있게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수통을 또 다음 병사에게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수통을 넘겨받은 병사 역시 물을 소리 내어 마시고는 다음 병사에게 수통을 넘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소대원이 빠짐없이 물을 마셨습니다.
마침내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 군종 목사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들 중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돕고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요,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하기에 이것을 잊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나 조직은 늘 불안하고 곤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곧 나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곧 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메아리는 내가 낸 소리 그대로 내게 되돌아옵니다. 부드러운 사랑의 외침은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으로, 악에 받친 듯한 앙칼진 소리는 앙칼진 그대로 돌아와 결국 자신의 폐부를 찢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요, 절대로 변치 않는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다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언어들이 난무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의 발언에 독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독기에 열광하는 외침들이 한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심성이 점점 더 황폐해지고 갈급해져 가는 듯합니다.

예수가 오신 12월입니다. 이제는 절제와 나눔, 그리고 서로 보듬는 언어들이 풍성했으면 합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우리는 다 한 가족이니까요. 저들이 전쟁터에서 나누어 마셨던 수통의 물이, 그 마음들이 한없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