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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4. 19. 제6차 성서공동체 연차대회 주제강연 구미정 박사*
21세기를 향한 공동체성서연구
1. 쿼바디스 교회(Quo Va Dis, Church)?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호세아, 4:1b-3)
자고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은 죽음이다. 그것은 그동안 그토록 사랑하면서 애지중지한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내려놓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과의 냉혹하리만큼 철저한 단절은 예로부터 먼 미래까지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으면서도, 결국 그것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 - 이것이 죽음에 대한 인간 실존의 기막힌 연관성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기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각한 '죽음 애호적'(necrophilic) 경향을 띠고 있다. 생명을 짓누르는 기운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들리는 것은 온통 신음소리 뿐이다(롬 8:22). 마치 몸푸는 여인이 소리지르듯, 첫아기 낳는 산모가 괴로워하듯 고통 중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렘 4:31). 지구 전체를 '더딘 죽음'에로 내모는 생태계 파괴의 현실과 '80대 20의 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시한폭탄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역사가 톰슨(Edward Thompson)이 지적한 대로, 현대 사회는 "박멸"(extermination) 또는 "근절"(extinction)의 의지로써 철저히 무장한 채 터보 엔진을 달고 질주한다. 모두가 죽임의 세력 아래 붙잡혀 있고, 모두가 죽음의 공포 아래 떨고 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비단 생물학적 이유 때문이 아닌 것이다. 길고 지루한 병마와의 싸움 끝에 찾아오는 죽음은 차라리 반가운 손님처럼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다. 예고 없이 돌연히 찾아오는 죽음에서도 그 과정은 대단히 찰나적이므로, 죽게 된 당사자에게는 공포를 느낄 여유마저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인류의 근본적인 숙제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죽음에 관한 한 그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체념적 풍토에 익숙하게 된다. 죽음을 '숙명적' 혹은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쾌락주의 문화나 파괴주의 문화를 잉태하게 되어 있다. 죽음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갈 길은 이 두 가지뿐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그리고 실존의 자명한 일부인 죽음의 문제와 맞부딪쳐 씨름하면서 적절한 응답을 제시하는 데 철학과 신학, 그리고 최근의 생명공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 다양한 죽음의 양상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본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인, 인터넷이나 약물에의 중독, 각종 잔혹한 범죄,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병의 발발, 생명복제 등등 너무나 많아서 열거하기가 어려운 정도이다. 이렇게 죽음의 골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사모하는 갈급한 요구가 더욱 많다는 뜻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한 물음 앞에 서도록 요청 받는다. "쿼바디스 에클레시아?"(교회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2. 골고다 문화의 정수리에 못을 박은 자, 예수
죽음을 표현하는 성서적 상징은 지옥이 아니라, "골고다"(히브리어; 라틴어로는 갈보리) 이다. 골고다는 문자 그대로 "해골"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스님은 해골을 손에 들고 물을 마시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또한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데, 나는 그저 '해골'하면 일체의 부연 설명도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죽음밖에 연상되지 않는다. 해골, 즉 골고다는 죽음이다. 이 골고다를 향하여, 아니 죽음을 향하여 죽음을 선고하시려고,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이려고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다(눅 23:26-33).
오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의 그 숭고한, 그러나 지친 발걸음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상징으로, 명령으로, 아니 권유와 초대로 다가온다. 그분은 지금 골고다 문화의 한복판으로 가고 계신 중이다. 십자가라는 망치를 들고, 당신 자신의 몸을 못으로 내놓음으로써 죽임의 문화를 끝장내려고 올라가신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이해해주는 이 없이, 마치 실패한 예언자처럼 하나님께나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그렇게 초라하게 걷고 있지만, 그의 죽음에는 위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골고다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요, 투쟁이다. 뭇 생명을 죽임에로 내모는 세상 질서를 부정(No)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역사 속으로 끌어오는데 긍정(Yes)한 생생한 자기 표현이 십자가로 집약된다.
당시의 골고다 문화는 무엇인가? 무력으로 약소국을 짓밟는 정치적 제국주의, 재물로 가난한 자를 업수이 여기는 황금만능주의,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민중을 오도하고 정죄하는 종교적 율법주의와 윤리적 엄숙주의가 그것이다. 예수의 삶을 보면, 우선순위는 늘 생명, 그것도 '꺼져 가는 등불처럼' 연약하고 가엾은 생명에 대한 철저한 보호와 돌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해골의 정수리에 못을 박으러 올라갔다. 죽임의 질서를 대변하는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았지만, 실제로 못이 박힌 부분은 골고다 문화의 한복판이다. 예수 사역의 완성이 십자가라는 뜻은, 그의 공생애 3년이 십자가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뜻이고, 따라서 그의 삶과 가르침이 골고다 문화를 종식하는데 집중되어 있었음을 함축한다. 해리슨(Beverly W. Harrison)의 지적대로, 예수의 죽음은 "사랑의 사역을 철저히 수행하는데서 분노의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말해 우리의 온전한 관계를 왜곡시키고 약자를 희생에로 내모는 불의한 사회구조에 예수가 얼마나 분노하고 저항했는지를 보여준다.
경험적으로는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것 같아도, 예수의 경우에는 생명이 죽음을 이겼다는데 그 예외성과 상징성이 있다. 죽임의 권세가 예수라는 이 충일한 생명력을 도저히 소화하지 못하고 3일만에 토해낸 것이다.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 이미 예수가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으니 예수를 따르는 우리도 능히 그리할 수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부활신앙이다. 즉 승리에 대한 확신이 부활신앙인 것이다.
3.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다시 지금의 사회를 보자. 구조조정과 대량 실업에 떠밀려 한편에선 걸식자와 노숙자가 넘쳐나고, 다른 한편에선 사치와 과소비가 기승을 부린다. 엽기적인 패륜범죄가 넘실대며, 원조교제니, 자살사이트니, 이민 열풍이니, 도처에 죽음의 파편들이 널려있다.
교회 안은 어떤가?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는 패러다임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교회 역시 사회의 거울로서 죽임의 기운이 만연한 것을 본다.
일찍이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인의 삶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한 적이 있다. 교회형(church type), 종파형(sect type), 신비주의(mysticism)가 그것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유형을 가지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삶 내지는 윤리적 태도를 분석하였다. 이를테면 교회형은 교회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결과로서 은총과 구원을 담지하고 있는 사회제도로 받아들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협력하는 태도를 말한다. 반면에 종파형은 세상과 비타협적으로 그리스도가 준 새로운 법에 따라 살면서 성도의 완전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한편 신비주의란 형식적, 제도적, 교조적인 신앙형태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 양태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땅의 교회들이 트뢸취의 유형 분석에 들어맞지 않는 독특한 제4의 유형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는, 무기력한 교회형이나 종파형 그리고 불건전한 신비주의 유형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미적지근한 교회들의 경우, 개교회주의(church-individualism or individual churchism)라는 독특한 신앙유형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것이 온갖 병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존 캅(John Cobb, Jr.)이 진단한 대로, 현대 교회가 죽어가는 원인이 '미적지근함'이라는 영적 질병에 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많은 문제점들을 청산할 능력이 없어서 영적 죽음에 직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교회주의는 한마디로 '내(가 다니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자폐증적 논리로 요약된다. 이 논리는 경직된 절대주의와 물량주의, 호전적인 군사문화 및 우민정치에 의해 뒷받침되어, 웬만해선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최근 교회의 핫이슈로 떠오른 '담임목사직 세습'의 문제는 한국형 개교회주의의 또 하나의 병적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생명체는 동종교배(inbreeding system)가 반복될수록 열등해지고, 이종교배(outbreeding system)에서만 강인한 우성이 나타난다고 한다(박노해의 시, "희망의 뿌리 넷"). 서로 만나 부대끼는 폭이 좁아지고 닫히고 동질화되면, 그 삶은 동종교배를 반복하는 것이고, 마침내 약해져서 도태될 운명에 처하기 마련이다.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개교회주의도 그렇다. 다양한 만남의 가능성들을 미리 차단하고, 그로 인해 창출될 서로 다른 깨달음과 삶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양상들을 아예 묵살한 채,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된 삶을 반복하다보면 나르시스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의 애정어린 시선으로 오늘날 교회를 다시금 보자. 흔히들 '큰 교회/작은 교회', '자립교회/개척교회', '도시교회/시골교회', 이렇게 나누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확장과 성장, 그리고 시장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이웃 교회는 경쟁상대일 뿐이지, 한 지역을 위해 공생 협력하는 '형제자매'라는 인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연유로 소위 전도 전략이라는 것은 '새 신자'(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의 양육보다는 '헌 신자'(남의 교회에 멀쩡히 잘 다니는 사람)의 찬탈에 더욱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이 밝혀주는 대로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하는 생태학적 원리에 의하면, 어느 한 존재의 지나친 양적 팽창은 다른 존재의 불행한 소멸을 전제로 한다. 즉 제한된 한 지역에서 특정 교회가 교인 뺏기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부흥 성장을 자축할 때, 패배한 다른 교회는 문을 닫게끔 되어 있다. 이처럼 반생태적인 현상이 오늘의 한국 교회사를 수치스런 얼룩으로 뒤덮으며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왜곡된 교회 성장논리에 떠밀려 교회마다 초미의 관심사는 온통 생존과 성장이지, 결코 죽임의 문화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개교회주의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게토화된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할 처방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나? 교회 안팎의 골고다 문화에 맞서 생명문화를 펼쳐나가기 위하여 교회는 어디서부터 전염적인 저항을 시작하여야 하나? 도대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4.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이제 주께로 돌아가자.
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자.
애써 주를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 6:1-6)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경험적으로는 불안하여도 신앙적으로는 '뻔한' 싸움이라고 믿는 까닭은 하나님이 다윗 편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음마저도 굴복시키지 못한 예수의 생명력을 믿기만 하면, 골고다 문화가 아무리 거대하고 막강하여 그 앞에서 우리는 마치 '밥'처럼 보일지라도,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그처럼 자명하게 우리가 승리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가 개교회주의를 넘어서서 '아웃브리딩'을 하는 출발점이 바로 작은 교회 연합운동이다. 교회가 골고다 문화의 정수리에 쐐기를 박는 지점도 역시 작은 교회들이 연대하여 공동체 문화를 확산시키는 곳에 있다. 여기서 작은 교회란 양적인 면, 수적인 면에서의 작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것들(마 25:45)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헌신한 예수의 사랑을 '대물림'하여, 항상 작아지고 낮아지고 가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소박한 교회를 말한다.
작은 교회는 삶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에, 죽임의 위협에 날마다 노출되어 있는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존재하기 때문에, 작지만 큰 교회다. 작은 교회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한 지역의 건강한 순환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자양분으로서 혹은 구심체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려면 무엇보다도 '작은 교회됨'의 자부심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대개의 작은 교회들이 연대에 뛰어들다가도 다시금 개교회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작은 교회가 스스로의 신학과 실천을 갖지 못하면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막상 부딪쳐 싸워야할 거대한 적(골고다 문화)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적(이웃 교회)과 경쟁하게 되는 분열과 파괴논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는 그 자체의 존립 성패가 공동체적 연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가 있었다. 비록 자발적인 동참은 아니었으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주었고(눅 23:26), 예루살렘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에게 용기를 주었다(27절). 심지어 결사를 앞두고 고민하던 무렵에도 한 무명의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음으로써 그의 결단을 지지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않을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마 14:1-9).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좇아 함께 온 여자들(55절), 그의 무덤을 지키다가 마침내 부활을 목격한 그들(24:1-10)은 예수가 가신 길의 동반자였다. 죽음이 단절과 망각을 뜻한다면, 최소한 이 여자들에게는 예수의 죽음도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예수와 연결되어 있었고,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기(8절) 때문이다.
연대(solidarity)는 당위이고,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도 공동체적일 때에만 그렇다. 한국형 연대는 종종 패거리 문화와 동의어였기 때문에, 공동체적 연대를 구현하는 일은 아직 실험단계에 있다. 공동체로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서를 연구하며, 그렇게 안으로 채워진 영성을 생활 나눔으로, 지역 섬김으로 외화(外化)시킬 때 비로소 생명 살림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적 영성은 사사화(私事化)된 경건주의적 영성과 확연히 다르며, 오히려 조화와 균형, 복거(卜居)와 상생(相生)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생태학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5.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의 힘으로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신명기, 30:19)
작은 교회 공동체 운동이라는 역동적인 관계의 그물망에서 하나의 그물코로 엮어있는 우리에게는 이제 함께 힘을 모아 생명문화(biophilic culture)를 펼쳐나갈 사명이 있다. 이것은 결코 '지는 게임'이 아니다. 다만 인내와 믿음이 요구될 뿐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무도 '오는 아침'을 막아낼 자는 없으며, 그 무엇도 아침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자를 당해낼 수는 없다. 새벽이 오는 속도는 독수리의 날개 짓보다도 빠르기 때문이다(시 139:9에 나오는 "새벽날개"라는 표현의 풀이). 언제나 새로운 것의 출현 내지 창조는 "혼돈, 공허, 흑암의 깊음"(창 1:2)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세상에서 '힘'은 늘 큰 자, 가진 자, 있는 자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위험과 도전 둘 다를 내포한다. 즉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어떠한 세상적 힘도 그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심판적 의미와 더불어, 힘있는 자에 대한 복종의 신화를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적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죌레(Dorothee S lle)는 전능하다는 점에서만 위대한 하나님은 우주적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인간의 무능을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녀는 힘을 두가지 개념, 곧 권세(exousia)와 능력(dunamis)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독점적이어서 악하며 강제적인 힘이지만 후자는 나누는 힘이어서 선하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힘은 능력이지, 권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현대의 새로운 성령운동의 특징을 가리켜 "억눌렸던 것들의 복귀"(return of the repressed)라는 말로 집약하였다. 지배적인 권세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던 것들이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살아나고 있음을 환영하는 표현이자, 새 시대를 열어가는 주체는 바로 주변부에 있다는 통찰이다. 작은 교회가 거대한 죽임의 권세에 맞서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발휘할 때 그것은 성령운동의 산실이요 새 시대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작은 교회는 함께 모여 몸으로 성서를 읽고 체화(體化)하는 공동체성서연구를 통해 이러한 사역을 감당해갈 수 있다.
작은 교회는 힘있는 교회다. 그 힘은 아직 약자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갖는 힘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적인 권세와 멀리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눅 6:20). 제인웨이(Elizabeth Janeway)는 약자의 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로, 약자의 힘이란 강자에게 의심을 품는 능력이다.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지배 관념에 의심을 품었을 때, 그것이 바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작은 교회도 교회 성장학파의 부흥 논리에 편승하지 않은 채 질적으로 성숙한 정체성을 다듬는데서 그 생명력이 나온다. 둘째로, 약자의 힘은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배질서를 답습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주고 이끌어주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약자들의 나누는 힘은 더욱 커진다.
필리핀의 민담인 "궁구탄과 배불뚝이" 이야기로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배불뚝이에게 어느날 궁구탄이 찾아와서 꿈을 털어놓으라고 하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배불뚝이는 그 위세에 눌려 얼떨결에 거짓말로 꿈을 지어내게 된다. 하지만 궁구탄은 그가 꿈에서 보았다는 그것을 실제로 찾아내라고 윽박지르고, 겁에 질린 배불뚝이는 우여곡절 끝에 궁구탄을 등에 업고 무작정 달리다가 우연히도 그것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한참 뒤 부족의 사냥놀이에 이끌려온 배불뚝이는 억지로 궁구탄을 업고서 황금 뿔을 가진 사슴을 좇아 다니다가 마침내 사슴을 잡자마자 궁구탄은 사라지고, 이 배불뚝이는 아주 멋지고 날렵한 청년으로 변신하여 부족장의 딸과 결혼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료하다. 주입된 꿈일망정 그것이 현실로 되기까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겪어야 하며 꿈을 이루는 모험에 자기를 적극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궁구탄은 누구인가? 덩치만 비대해지고 뛸 줄도 모르는 배불뚝이에게 꿈을 꾸라고, 그 꿈을 이루라고 호통치는 이 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역사의 소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소리일 수도 있으며, 죽어 가는 약자들의 소리, 심지어 돌들의 소리일 수도 있다. 이 소리가 자유롭게 울려나오는 현장이 바로 공동체성서연구인 것이다.
바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작은 교회 운동은 한숨 한숨씩 숨결을 고르면서 오래 달려야 하는 운동이다. "가축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뚜렷한 징표는 없더라도, 잦은 왕래와 교제가 쌓이면서 생명이 자라난다는 뜻이다. 작은 교회 연대운동이 승리하기 위해서도 그와 똑같은 발걸음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 단순히 '기도하고 있다', '관심 갖고 있다'는 말로써 게으름과 무관심이 포장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승리가 없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의 절정을 '해골'로 정하고,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갔기에 그는 해골의 정수리에 십자가를 꽂을 수 있었다. 예수는 단순한 '로고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였다.
오늘날 골고다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의 생명력으로부터 끊어내서 죽음의 권세에 접붙이려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 공동체적 눈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프락시스에 엄청난 자극과 도전과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공동체성서연구는 높고 낮음이나 옳고 그름이 없이, 다만 진솔함에 비중이 실리는 말씀과 생활의 나눔이다. 부자, 권력자, 연장자, 남자, 성직자 중심의 가부장적-위계적 교회 모델을 뛰어넘어, 포괄적-참여적 모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성서 읽기라고 말할 수 있다.
20년을 걸어온 공동체성서연구의 길, 그리고 그에 기반한 작은 교회 연대운동이,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처럼, 죽임의 권세에 맞서 생명을 살리는 힘찬 상징이 되어 한국 교회의 체질을 변혁시키는데 공헌하기를 기대해 본다.
* 구미정 박사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윤리학 박사, 협성대,목원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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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20 11:04: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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