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남긴다는 것,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종종 잊고 살 때가 있다. 잊고 산다기보다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경우 최소한 다음 세대는 되어야 그 기록들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리라. 또 기록의 주인공들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혹은 이끌어 간 경우에만 의미 혹은 힘이 있다는 선입감 때문이리라. 하지만 역사를 이 땅을 살아간 모든 사람의 발자취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기록은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고 남겨져야 하리라. 그렇게 본다면 평범한(?) 개인들이 자기 삶의 발자취를 글로 남기는 최근의 경향은 무척 뜻있는 일이고 격려받아야 마땅하다.

오래전,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교회 식구들과 방문한 적이 있다. 잘 정돈된 전시관 한편에 붓으로 정성껏 쓴 책이 한 권 펼쳐져 있기에 무심코 들여다보던 나는 가슴이 ‘쿵’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주기철 목사님이 집사 시절 섬기시던 교회의 어느 해 부흥회 연보 기록이었다. 거기에 선명하게 주기철이라는 이름 아래 그가 한 연보액수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연보를 드리면서 기록으로 남겨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뭇 사람들에게 공개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성경에는 정말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의 사역과 관련된 이들의 이름을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름도 언급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사역을 돕고 충성했던 이들을 칭찬하며 소개하는 내용이다. 특히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에는 그러한 이들의 이름과 함께 감사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편집자와의 약속대로 12월호로 ‘목회일기’를 마감하면서 소심하게(?) 바울의 흉내를 내보려 한다. 사도의 곁에도 갈 수 없는 미말 微末 종이지만 짧지 않은 목회 기간에 만난 잊히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기에.

A 권사님. 남편이 인근 학교 교감이던 분이다. 읍내 큰 교회로 출석하시던 분이었는데 흥부네 집만큼이나 엉망이던 교회에 부임하여 동분서주하던 철없는(?) 전도사가 안됐던지 담임목사님 허락을 받고 이명해 오신 분이다. 남편이 전근해가기까지 기도와 격려와 헌신으로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지금도 디모데에게 바울처럼 잊혀지지 않는 신앙의 어머니 같은 분이다.

B 청년. 뇌전증(epilepsy/간질)으로 중학교를 겨우 마친 청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거친 일을 해본 적 없는 초보 전도사를 대신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배필을 만나 지금도 교회에서 집사로 기둥 같은 역할을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C 집사님. 교회 관리부장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던 분이다. 교회에서 제법 멀리 사셨지만, 사시사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한 번은 꼭 교회를 둘러보시던 덕분이다. 집사님이 어린 자녀들을 두고 마흔일곱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셨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하지만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다.

D 권사님. 공산주의자로 육이오 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어머니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후 주님께 충성하던 분. 처음 뵈었을 때 이미 팔십을 바라보는 연세였지만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른으로, 사회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서 젊은 목사를 지켜주시던 분. 시골이었지만, 그분의 배려로 그곳에서 대학원도 마치고 목사의 권위(?)를 인정받으며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분의 인품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교회와 목사의 위치가 지역사회에서 확고했다.

E 집사님. 지체장애에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악착같이 3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내신 분이다. 젊어서는 아이들이 교회간다고 몽둥이를 들고 예배 중인 아들을 끌어냈다던, 그래서 늘 회개하며 후회했던 분, 그러나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모든 면에서 교회에서 초대교회의 뵈뵈집사를 생각나게 했던 분. 너무 늦게 예수님을 만난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래서 더욱 충성했던 분. 90이 가까운 연세에도 섬기는 교회에서 목사에게 큰 힘이 되어주신다는 소식이 들린다.

돌아보면, 어찌 이분들뿐이겠는가. 하지만 어쩌랴, 지면이 좁은 것을! 그분들께 감사하며, 신실하신 주님께서 이 모든 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어쩌면 목사로서의 오늘의 나는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의 결과물이리라.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 목회일지를 연재하신 이준우 목사님과 애독해주신 햇순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2020년 1월부터 이준우 목사님의 목회컬럼으로 기획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