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호기 사회학 교수가 쓴 칼럼 <‘절반의 모더니티’로서의 한국사회>(경향, 2019. 7. 2)를 본 일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이 칼럼에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연구’ 라는 조사 보고서 가운데 몇 가지 설문에 대한 응답 자료를 주목합니다.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에 ‘그렇다’가 63.15%, ‘아니다’가 13.25% 라는 응답이 그것입니다. 김 교수는 이 자료를 근거로 지금 한국 사회를 ‘불신의 사회’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불신’은 ‘불안’과 짝을 이루어 연쇄적으로 부정적인 사회 현상을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각자도생, 약육강식,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가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라는 것이지요. 물론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최근 우리 사회 분위기가 불신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이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우방의 한 축인 일본은 느닷없이 우리의 허리를 꺾어버릴 요량으로 경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의 혈맹이라는 미국은 일본의 대 한국 처사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면서 방위비 더 내라고 겁박입니다.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무력시위에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맛보기 군사도발입니다. 가히 사방팔방으로부터 욱여쌈을 당하는 형국입니다. 문제는 외부의 공격보다 외부의 공격을 빌미삼은 우리 내부의 무차별 공격입니다. 집권을 도모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호재가 없나봅니다. 모두가 문재인 정부의 실정, 외교참사, 안보무능, 인사전횡의 결과라고 비난을 쏟아냅니다. 지금 나라가 가라앉고 있다며 불안을 증폭시키는 일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공격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입니다. 자기들만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제정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의 소식이 끊기자 산 아래 백성들은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의지하던 지도자가 사라졌으니 불안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가서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어달라고 채근합니다(출 32:1). 평소 모세에게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아론은 백성들의 간청이 내심 기뻤던지, 두 말할 것 없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리고 축제의 날을 선포하고, 금송아지를 모신 제단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며 마치 신들린 듯이 열광합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자기 최면의식으로서의 열광입니다. 이 괴악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빨리 내려가서 백성들을 심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오히려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출 32:11-13).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가납하시고 백성들에 대한 징벌을 거두십니다.

아론과 모세가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불안 심리에 영합해서 제 잇속을 챙기려 했고, 모세는 자신으로 인해 백성들이 불안해했으니 스스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혹은 지도자란 단지 명성이 있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세처럼 백성의 허물을 대신 짊어질 수 있어야 중보자 혹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자기희생이 뒤에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상호 불신으로 인한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부유합니다. 그리하여 더더욱 삶의 안전을 담보 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루한 짓을 하기도 합니다. 정치권은 불안을 잠재우기는커녕 더욱 부채질합니다. 이럴 때 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현대판 우상에 열광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법과 규범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보다 내가 바라는 바를 해주겠다는 아론과 같은 지도자가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내게 요구하는 지도자보다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지도자가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렇게 자기가 원해서 독약을 먹고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교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불신과 불안의 포로가 되어 집단 파멸을 막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분별력을 지닌 깨어있는 신앙, 깨어 있는 시민 의식이 절박합니다. 외적의 공격보다 더 두려운 것은 우리 내부의 기회주의에 편승한 비열하고 난폭한 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