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달팽이처럼 느리다 싶을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1년이 지났네요.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약속드린 것처럼 저도 엄마도 가용이도 다 잘 지내요. 가용이는 1주일에 한번 꼴로 “꿈에 할아버지 나오셨다” 했어요. 할아버지 어떠시니, 할아버지와 무얼 했니 물으면 예외 없이 “맛있는 것 먹었다” 하더라고요. 가용이와 식도락을 즐기고 싶으셔서 꿈에 나타나셨구나, 잘 지내시는구나 위안이 되었어요.

사실 2014년은 제 생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해로 기억될 듯해요. 2월에 아버지 가신 뒤 세월호를 맞았고 뒤이어 아버지가 아들처럼 아끼시던 홍빈 선배가 갔잖아요. 한꺼번에 찾아온 죽음들로 매 순간 참 힘들었는데 그래서 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열심히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 생각의 끝은 아버지가 하셨던 이야기, 아버지의 삶과 만나지기도 했어요. 평생 ‘잔소리’처럼 되풀이 하셨던 그 이야기들, 영성과 지성의 조화, 좌·우 밸런스, 그 분에게 내어 맡기는 삶, 나날이 새 날, 오늘 죽을 준비, detachment, 즐거우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찾아라, 자유로운 삶, 자기관찰 등등.

아버지가 평생 고생하면서 일구어 내셨지만 어딘가 흔적만 남긴 채 흩어진 것 같아 보이는 작은교회, 공동체 운동, 진통을 겪은 대학교회에 대해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머물렀어요. 한 20여 년 전인가 제가 ‘작은교회’는 실패한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지요? 아버지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을 했던 저 역시 아프고 힘들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한 소박한 음식도 특별히 맛있게 먹는 법 같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부터 삶의 가치와 의미 같은 거대한 문제까지 아버지는 저에게 많은 것을 처음 가르쳐 주신 스승이셨고 그런 만큼 아버지의 실패가 저의 실패처럼 느껴졌거든요. 지난 해 아버지가 안 계신 상실감 한 구석에 그 비슷한 감정이 되살아났어요.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애쓰셨던 것일까, 그리고 가족보다 본인보다 우위에 뒀던 아버지의 노고는 왜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것일까.

가용이하고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해요. 할아버지라면 지금 뭐라고 말씀하실까. 아마 위의 제 질문에 대해 아빠는 그러시겠지요. 다 괜찮다고. 아니 그런 과정을 겪을 줄 알았다고.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 괜찮은 것 같네요. 아버지가 추구하신 그 길이 세상과 부조화를 이뤘던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 스스로 그 길과 부조화를 이뤘기도 했겠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그 부조화들을 굳이 감추지 않으셨잖아요. 타고난 다혈질과 강인한 모습 뒤에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목회자의 모습과 삶을 즐기는 자유인으로서의 모습처럼 아버지 안에서, 그리고 목회자의 전형과 부조화를 이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목회자이기 이전에 불완전한 한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내면서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부조화를 이뤘던 아버지, 아마도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실패한 목회자. 그 부조화가 제 마음 속에 울림으로 남아요. 아버지의 삶을 되새기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어쩌면 저 역시 세상과 부조화를 이룰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 삶과 생각에도 부조화가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계셨고 그 삶이 제 마음 속에 울림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부조화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부조화를, 불완전을, 실패를 기쁘게 받아들여요. 제 삶에서 부조화와 실패가 새로운 울림으로 남을 것임을 감사해요.

아버지라면,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하는 한 아버지가 저희와 함께 살아계심을 기억할게요. 아마 제게 바라시는 방식 그대로 살지는 않겠지만 제가 가는 그 길이 아버지가 바라시는 그 길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아버지, 그 곳에서 잘 지내세요. 다음에는 제 꿈에서 맛있는 것 먹으러 가요. 수술실 들어가시기 전 드시고 싶다던 장어, 꼭 사드릴게요.

아버지의 사랑하는 딸, 진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