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쉽게 잊혀지지 않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다. 이요한, 이것이 그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월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가정을 꾸몄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독신이다. 주위 사람들이 어쩌다 이렇게 혼자 사느냐고 물으면,
“회사와 공장이 가정이고 벽돌과 기왓장이 모두 자식인데, 뭘?” 한다. 바로 벽돌 공장과 기와 공장을 가진 사장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키가 작고 늙었지만 쇠처럼 단단하게 생겼다. 피부 빛깔도 검붉어 양복만 입지 않았다면 그대로 시골 농사꾼의 모습이다. 그러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맑고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쨍쨍 울린다. 걸음걸이는 사관 후보생들의 걸음걸이같이 씩씩하고 빠르다.
“노인께서는 어찌 그리 기운이 좋으십니까?”
하고 누가 물을라치면,
“아마 나는 고향 구경하기 전에는 눈을 감지 못할 거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할아버지가 하나님을 알기 이전의 대답이다. 통일 같은 큰 일이나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자기 회사 물건을 팔기 위해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를 내는 법이 없다. 어쩌다 광고회사 직원이 찾아오면,
“우리 회사 물건 그 자체가 광고요. 시원찮은 물건 만드는 사람들이나 돈 들여 광고를 내지…….”
하고 두말없이 돌아앉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청에서 며칠 내에 보도 블럭 수만 장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밤낮으로 작업을 하면 기일 내에 그 만큼의 물건을 만들 수는 있소. 그러나 돈만 생각하고 무리하게 만드는 물건은 제대로 된 물건이 될 수 없소. 물건이 우리 공장의 생명인데 질 나쁜 물건이 될 걸 알면서 그걸 만들어 팔 수는 없지요.”
하고 거절했다.
이런 요한 할아버지가, 어느 해 초가을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때 부산행 삼등칸에서 생긴 일이다.

삼등칸은 서울역에서 벌써 좌석이 거의 다 찼다. 할아버지는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앉은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까지 가시나?”
할아버지는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 수원까지 갑니다.”
“대학생인가?”
“네, 수원에 있는 서울농대에 다닙니다.”
“서울 농대라, 좋은 대학에 다니누먼.”
앞자리에는 역시 그 학생의 일행인 듯한 처녀 둘이 앉아 자기들 얘기에 열중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젊은이들에게 무엇인가 유익한 얘기를 해 주고 싶어 잠시 생각하였다.
언젠가의 일이었다. 교회에서 한 처녀 바이올리니스트를 초청하여 그 연주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음악을 모른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주회가 끝난 후 교회의 몇 사람과 함께 그 처녀 바이올리니스트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처녀, 올해 몇 살이나 됐소?”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이도 많지 않은데, 그렇게 이름난 음악가라니. 도대체 몇 년이나 걸려서 이만큼 됐는가?”
“일곱 살 때부터 했습니다.”
“허허, 그럼 18년이나 걸렸다는 얘기구먼. 그 동안 학비도 굉장히 들었을 텐데. 물론 부모님께서 대 주셨겠지?”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삯바느질로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 자네도 훌륭하지만 어머님이 더 훌륭한 분이시구먼. 그런데 한 마디 묻겠는데, 그 바이올린이라는 거 어머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켜 드린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내가 처녀의 음악을 잘못 들었군. 일생 동안 자네를 위해 희생한 어머니에게 먼저 들려 드릴 음악을 듣고 손뼉까지 쳤으니, 원.”
“어머니는 음악을 모르십니다.”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는가? 자네 음악을 위해 일생을 바친 어머니가 자네 음악을 몰라? 건성으로 들려 드리지 말구 참 효심으로 들려 드려 봐. 그래두 어머니가 모르신다면 그 때는 자네 음악이 가짜일세.”
그 때서야 처녀는 더 말을 못하고 붉힌 얼굴을 푹 숙여 버렸다. 할아버지는 타이르듯 말을 이으셨다.
“오늘 집에 가는 즉시 어머님께 ‘제 바이올린 한번 들어 보세요’ 하고 연주를 해 드려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하던가, 그런 노래 있지?”
“네.”
“나하고 약속해야 돼. 그 결과를 내게 편지로 알려 주겠나?”
“네”
과연 그로부터 사흘 후, 할아버지는 그 처녀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그 처녀의 이야기를 들려 줘야겠군.’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세 젊은이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승객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통로의 출구 쪽에 보기에도 처참한 환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도 야위어 흡사 골격 표본같이 뼈만 남은 젊은 여인이 친정어머니인 듯한 중년 여인의 어깨에 실리다시피 한 채로 쓰러질 듯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