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시인의 <틈>이라는 시이다. 시멘트 틈새에서, 아스팔트 틈새에서, 용케 뿌리내리고 자라는 이름 모를 풀의 경이로움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금방 알아챌 것이다. 틈은 생명이다. 틈이 없으면 숨이 막힌다. 생명은 틈에서 자란다. 틈은 생명의 모태이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안면을 트자’, ‘말을 트자’고 하나 보다. 안면을 튼다는 것은 서로 막연하게 멀리서만 보던 사이에 본격적인 사귐의 계기를 만들어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말을 튼다는 것은 ‘말을 놓다’는 것과 유사하게, 형식과 규제에 갇혀 있던 인간관계를 보다 친밀한 내적 관계로 돌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야말로 인간관계에서 부수적이고 외적인 요소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집착하는 우리의 아둔함을 내려놓는 것이니, 말을 놓는 행위는 사귐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릴 적 새 학년이 되어 담임선생님과 첫 대면을 하는 날이면, 내 나름대로 선생님을 ‘좋다, 싫다’고 판단한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틈이었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선생님, 지나치게 깐깐하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선생님, 파리가 앉으면 낙상할 정도로 칼날 같은 외모와 차림새를 갖추고 말투와 표정에서 차가움과 냉정함이 번갈아 느껴지는 선생님, 이런 선생님을 만나면 한마디로 ‘행복 끝, 불행 시작’이었다. 반대로 허점투성이 선생님, 베토벤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말도 더듬거리고 소매 끝에 때가 묻어있고 양복바지 무릎 부분이 튀어나와 있는 그런 ‘만만한’ 선생님을 만나면, 교실 분위기는 좀 소란스러울망정 최소한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구조적으로 억눌림을 당하는 무력한 약자의 위치에 있을수록 이렇게 틈에 매료당하고 틈에서 해방감을 맛보는 지도 모르겠다.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를 대신하여, 신체장애가 있는 조카를 돌보느라고 외출 한번 변변히 하지 못하던 우리 어머니에게 우울증이 나타난 것은 재작년이었다. 외할머니로서 손녀가 예쁜 것은 당연하고, 어머니로서 딸이 안쓰러운 것도 당연한데, 그런 마음과 별도로 자꾸만 위축되고 서럽고 억울한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그야말로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일상 속에서 어머니의 우울증은 여러 가지 심신장애로 나타났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틈’이라고 생각한 나는 언니와 지혜를 모았다. 어머니에게 매일 수영장에 다니시게 하고, 노인복지회관에서 수지침과 구연동화 등을 배우시도록 강권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급적 내가 있는 대구로 내려와, 학교에서 나누어준 주말농장에 가서 일하시도록 했다. 뭐든지 심고 가꾸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한 배려였다.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어머니는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셨다. 특히 주말농장에서 일할 때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니셨다. 풀 조금 뽑고는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허리야 금방 주저앉고 마는 한심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맨손으로 흙을 만지고 다독이면서 그 고운 목소리로 찬송가까지 흥얼거리시며 행복하게 일하셨다. 수원 집으로 올라가서도 틈만 나면 밭에 가고 싶다고, 땅을 밟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시인의 말대로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밭일이 끝난 요즘 어머니는 수지침에 푹 빠지셔서 틈만 나면 교본을 읽고 외우고 실습하느라 주변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으신다. 어머니의 놀라운 집중력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은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는 게 우리 자매의 결론이다.

사람은 틈이 있어야 숨을 쉰다. 콧구멍도 그래서 있는 것이리라. 도저히 틈이 안 날 정도로 바쁜 일정에 시달린다면 억지로라도 틈을 내야 한다. 그렇게 생겨난 ‘틈틈이’ 자기 몸과 영혼을 보살피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만 비로소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에게 틈이 보일까봐 전전긍긍하는 현대인의 초상은 참으로 서글프고 불쌍하다. 빈 틈 없이 자기를 방어하지 않으면 남들이 치고 올라온다는 무한경쟁의 논리 아래 스스로를 혹사시키며 병들어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죽음을 선취하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틈은 곧 순환이다. 틈이 있어야 거기서 바람이 돌고 생명이 충전된다. 언젠가 TV에서 <열린 음악회-모스크바 공연>을 보다가 조영남씨의 “화개장터”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화개장터”라는 대목에서 재치 있게도 그는 이것저것 서로 이질적이거나 대립되는 두 요소를 잘도 끌어다 붙이며 계속 노래를 불러 나갔는데, 여기서 말하는 ‘화개장터’야말로 ‘틈새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해방구에서만이, 시인의 예견대로 “새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 해의 출발점이다. 새 일을 꿈꾸는 우리, 먼저 스스로가 틈 많은 인간인가부터 돌이켜볼 일이다. 내 삶에는 과연 빈 틈이 있는가? 그 틈새로 바람/성령이 들락거리는가? 내 삶은 순환하고 있는가? 나에게는 틈만 나면 달려가 안기고픈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이 있는가? 틈만 나면 하고 싶은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이 있는가? 새 수첩에 빼곡히 일년 계획을 적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틈 명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