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나는 또래보다 성숙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래와 노는 건 조금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사실 형들이나 어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마도 삶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을 일찍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다. 독립심이 강해 무슨 일이든 친구들에게 이끌려 가기 보다는 - 아니 이끌려 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내가 대부분 주도해서 이끌어 갔고, 공부든 운동이든 싸움이든 지는 건 꼭 내가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있는 힘을 다해 이기려 했다. 그래서 결국 어릴 적 골목 대장부터 현재 친구들 모임의 회장까지 ‘～장’ 이란 장은 도맡아 해오고 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내 자신 뿐 아니라 남들에게까지 한없이 오만해 질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가끔씩 이런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반성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아직도 나는 주변 사람들을 통솔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 가지고 산다. 얼마나 교만한 마음인가를 잘 알고는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게 사실이다. 게다가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기에 어떤 때에는 무고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 내기 까지도 했었다.

특히, 나는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돈을 주고 하래도 못할 것만 같다. 언제나 씩씩하고 외향적인 모습만이 나의 진정한 이미지라고 생각했고, 강해지기 위해 힘든 일이 있어도 견뎌내왔다. 에니어그램을 배우면서 내색은 안했지만 내심 놀랐던게 8번은 항상 타인에게 지배 받을까봐… 즉 꿀릴까봐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고 했다. 한번도 그런 마음을 내보인 적은 없었지만, 어릴 때 어리다고 무시당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언제나 내 맘속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고백한다. 그래서 참 힘들었었다. 겉으로 당당해 보이기 위해 나는 항상 독한 마음을 품어야 했고, 쉽게 나의 힘든 것들을 쏟아내지 못했기에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깊게 친밀감을 가질 수 없었다. 솔직히 나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가끔은 그 친구들에 대한 동정심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못나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실 특별하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는 양가감정이 있다. 안쓰럽기도 하면서도 답답해서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기분 좋을 때 누구보다도 후한 사람이다. 즉, 나의 지도력과 파워를 상대방을 위해서 쓸 만큼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보인다. 그러나 기분이 상하거나 특히 자존심이 상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나를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뿐이고, 당장 대결 구도를 만들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정말 에니어그램은 나를 잘 꼬집어 내고 있었다.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산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을 위한 이 지배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이 사람들을 따르게도 하지만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에니어그램을 통해서야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내가 꼭 적대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수해야 속이 시원했고 그것이 나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신에게 도전할 만한 오만함인지…. 실제로 타인의 불의를 봤을 때는 참지 못하고 정의를 부르짖기에 때로는 존경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일에 있어서는 모든 정의가 나의 이익을 앞서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이 모두가 결국 내가 사랑 받기를 갈구하고 있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약한 모습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닫고, 약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더욱 강해지려 했었다. 내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찌 남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겠는가. 에니어그램의 지혜라는 것이 과연 나의 이 깨달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8번인 나의 변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상대에게 복수하는 것이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믿던 것을 포기한다. 나는 고통에 직면할 때, 마음을 모질게 하던 것을 포기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던 것을 포기한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이 나의 영예를 나누도록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부드러운 감정과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8번 유형이 통합의 방향으로 가면 2번의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된다. 즉 나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애쓴다는 것이다. 남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실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난 후 요즘 친구들과 친밀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나의 힘든 것들도 털어 놓은 적이 있는데, 한결 그들과 친해 졌고, 스스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항상 내 주장이 뚜렷하고 강하게 밀어 붙이는 지도자가 내가 그렇게도 원하는 것이었다면 어느새 작은 순간이라도 날 따르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랑은 그들의 위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교류가 가능하고, 또 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세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내 옆에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소중한 내 재산인 것이다. 나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면 채울수록 허무함이 밀려오는 것은 그것이 내가 그렇게 정복하고 싶은 높은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박한 미덕을 가지고 나누며 사는 삶이야말로 내 깊은 곳에서 갈구하는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내가 원하는 지도자가 된다면, 나는 한없이 너그럽고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있는 그런 지도자가 되리라. 나의 뜨거운 동정심과 부드러움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헤쳐나가리라! 이렇게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