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가 육순을 맞는 팔월입니다. 실로 엄청난 변화를, 그것도 아주 빠르게 겪은 세월이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순의 나이 되어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순리를 따라 듣게 되었습니다. 현명하게 현실을 인식하며 살게 된 나이가 되었음을 확인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나 이제 이순의 나이가 된 사람이 전기를 쓰면서, 개인의 삶과 역사를 기록하며 동시에 사회가 어찌 변화하였는가를 담아내기 마련입니다. 광복 직후에서 건국 과정의 혼란과 격동, 정부수립 이후 6.25 동란의 고통과 상처, 전후에 재건과 부흥, 4.19와 민주주의 시련, 5.16과 군사독재, 5.18과 민주항쟁, 문민정부 이후 참여정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건과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나 육순의 나이가 된 사람들만큼 많은 경험을 하며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이 지구촌 다른 곳에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았습니다. 과연 위기에 강한 민족임을 스스로 자긍하며 자부하게 됩니다. 우리 내면의 격정이 그토록 끈질기고 강인하게 버티고 생존하게 하여 준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위기를 겪었으나 그 때마다 이 격정 때문에 이겨 낸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생존 본능이 자극되면, 모두가 한 마음 되어 ‘무조건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리되면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순발력과 저력을 나타냅니다.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위기를 넘기고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격정 때문에 또 다른 혼란과 불안정에 빠져듭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격정을 사로잡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평상시에는 우리가 ‘격정에 사로잡히는 것’때문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들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간에, 격정에 사로잡히면 “반복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즉 심리적 고착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하려고 마음먹는 일을 못하고, 안 하려고 마음먹는 일을 하게 됩니다. 흔히 자기 ‘의지에 반하여’ 행동한다고 하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생각 없이 말하거나 생각 안하고 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감정과 본능으로만 사는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우리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생각하게 되는데, 이라크 전쟁이 시작도 끝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미국의 지식인은 거의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며, 격정에 사로잡혀 부시 대통령의 말만 따르는 모습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영화 ‘화씨 9/11’이 흥행하여 그 정곡을 찌른 것으로 입증됩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때, 우리는 무엇을 안 보고, 안 듣고, 생각도 안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볼 것을 안 보거나, 더욱이 눈에 보이는 것을 안 보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나 감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치도 행정도 기업도 그 밖의 어떤 업무활동도 사람을 위한 것인데, 이것을 못보고, 일을 위한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을 소홀히 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결과에 이릅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와 의의가 무엇인지를 늘 묻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람을 다루는 정신치료나 심리치료에 있어서도, 오늘날 강조하는 것은, 치료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도, ‘사례 중심’이 아니라 ‘삶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육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 온 우리가 이제는 격정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분투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격정에 사로잡혀서 갈등을 피하고, 자기비하에 빠져들거나 나태해져서 또 다른 위기를 불러들이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외면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똑바로 인식할 일입니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의식하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격정을 천천히 사로잡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격정 속에는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과 무서운 저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분명히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바탕에서 우리사회의 전기를 새로 쓰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세계를 향하여, 근면과 끈기로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살리면서 평화를 만드는 건강한 사회의 전기를 써 나갈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