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작은 농촌 마을에 있는 우리 유치원에 근래 들어서 인도,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등의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유치원이 그야말로 글로벌하다.

지난 1월 중순 경, 신학기가 아님에도 자신의 어린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수 있느냐며 베트남에서 시집온 젊은 엄마가 김 봉식이란 다섯 살 난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자신은 시내에서 직장에 다녀야하기에 어린 아들을 유치원 근처 비닐하우스 농원에서 일하고 계시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겨서 우리 유치원에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아이의 아빠는 최근에 수술 받다가 돌아가셨고 지금까지 아들을 돌보아주셨던 시어머니는 84세의 고령이신데다 위암 수술 후 회복중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외손자를 돌보며 일하셔야 할 외할머니까지 교통사고로 허리 수술을 받으시게 되어 당분간 봉식이를 유치원에서 돌보아주기로 했다.

남의 아이를 돌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갑자기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도 얼마나 힘들어할지 알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이 아이를 잠시 동안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돌봐주기로 했다.

봉식이는 예절도 바르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제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많은 어린이였다. 요즘의 아이들은 지나친 과보호 속에서 키워져 처음 유치원에 온 아이들 중에 거의가 교사의 손길이 필요하다. 근데 이 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신고, 옷을 입는 것은 물론 화장실에 가서 뒤처리 하는 것조차 스스로 잘했다. 다문화 아이 치고는 우리말도 꽤나 또박또박 잘하고, 이해력도 좋으며, 유치원의 여러 가지 활동에도 잘 참여했다. 게다가 투정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 조차 없이…. 가끔은 남편이나 내 어깨까지 주물러 주겠다고 작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 주곤 했다. 크게 시원할리야 없지만 “아주~ 시원하다. 고마워”라고 말해주면 봉식이는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모른다. 아무리 봐도 아이를 유치원에 맡긴 엄마의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의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잔정 없는 아주 사무적인 느낌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아이를 맡기는데 미안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의아했었다. 얼마 후 어린 손자가 보고 싶다고 시내에서 찾아오신 친할머니를 뵙고 나서야 정작 봉식이에게 기본예절을 비롯해서 좋은 영향을 끼치신 분은 엄마나 외할머니가 아니라 친할머니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신학기 초에는 교육청과의 관계에서 원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가 많은 편이라 유치원에서의 하루 일정이 끝난 후에도 잔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내 대신에 남편이 어린 봉식이를 상대로 함께 놀아주는 시간이 많았다. 봉식이는 남자 아이답게 활발하게 온몸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는 놀이를 하며 지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자기와 잘 놀아주는 목사님이 너무 좋다며 목사님과 결혼을 하겠단다. 남편이 자신의 친구로서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봉식이와 함께 여러 날 지내다 보니 처음과 다르게 가끔은 떼를 쓰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해서 이제 제대로 우리와 친해지고 가까워졌나 보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봉식이 엄마가 아이를 시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유치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네가 아이만 낳았지 엄마 노릇한 것이 무엇이냐?”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동안 봉식이는 엄마와는 잔정이 안 들었기에 이제부터 엄마가 직접 돌보고 키우면 모자지간에 정도 더 많이 들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테니 그 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어 기꺼이 동의했다. 아이의 옷을 세탁하고 정리해서 마저 보내고 보니 그간 한 달여 함께 살며 정이 많이 들었던 봉식이의 난 자리 때문에 갑자기 집안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치원을 26년째 하면서 힘든 점 중에는 정이 들었던 좋은 만남 후에는 반드시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들과도 몇 년을 함께 일하면 헤어지게 되고, 유치원 원아들과도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후에는 헤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번처럼 몇 달 만에 헤어지는 어린 봉식이와 같은 경우도 있는데, 이처럼 많은 만남 중에서도 쉽게 잊혀 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독특한 인연들이 있다.

오늘 아침에도 식탁 위에 숟가락 받침대를 남편 것, 내 것, 봉식이 것 3개를 무심코 놓다가 하나를 도로 제 자리에 가져다 놓으며 이 봄에 만난 어린 봉식이의 미래를 위해 잠시 기도를 드렸다. 모쪼록 봉식이의 엄마가 좋은 엄마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봉식이도 자신의 엄마와 함께 하는 생활을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조율해 나가기를,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좋은 교사와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