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학교에서 10년을 지내고 지난해엔 안식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은 여느 해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좀 더 폭넓게 만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요. 지리산, 설악산, 북한산, 계룡산 등 수많은 생명을 품고 사는 산을 타면서, 짙푸른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은 너른 평야와 바람결 따라 굽이치는 키 작은 모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어둑해질 무렵 회청색 빛깔로 곡선을 그리는 산등성이의 멋들어진 라인과 잘 익은 홍시 같이 맛깔스런 색을 띤 노을의 절묘한 조화에 감탄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답다는 것에 놀라며 가슴이 따스한 기쁨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곤 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절로 찬양이 나왔던 순간들. 이러한 감동 속에서 쉼을 누리면서 여유를 가지니까, 사람들과도 더 쉽고 친근하게, 때론 더 진하게 만나졌습니다. 기차 옆자리에 앉은 어른과 대화를 터서 그분이 내릴 때까지 1시간 가까이 친한 친구처럼 쉴 사이 없이 수다를 떨고, 어느 마을에선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께 단순하지만 인생살이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귀촌해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젊은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즐거움과 고충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각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뵙고 도시와는 다른 삶을 몸으로 담뿍 느꼈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묘하게 느껴진 것은 사람살이의 실체는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 살든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비슷한 꿈을 꾸더라고요. 또 고만고만한 실망과 상처를 갖고 있고요. 공동체 속에서 드러나는 개개의 사람들의 본성도 유사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마다 현재 모습이 다르고 판이한 미래를 예견하게 되는 건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이었어요. 마을 속에서 꿈을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가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오랜 삶을 살아오시면서 터득한 지혜를 전수해주시는 어른이 계시느냐 아니냐, 마을이 탈바꿈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이번 글에서는 이것들을 깨닫게 해준 장면들,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전남 강진에는 ‘바보농부’라 불리는 농부님이 계십니다. 어느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빵이 먹고 싶으니 내가 만든 떡과 바꿔먹자는 글을 올린 농부님. 이 물물교환은 충북 제천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계신 분의 응답으로 훌륭하게 성사되었습니다. 그 때 만족감은 매우 컸고 바보농부님은 이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통로의 역할을 하시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오프라인 상에서도 모임이 생겨 정기적으로 장터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장터 입구에는 "숫자를 잠시 내려 놓으세요", "값보다 가치", "말로 주고 되로 받는 마음으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고 해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화폐 가치를 넘어서는 삶을 실제로 이뤄가고 계신 것이지요. 농부님은 ‘필요 이상 축적하기 위해 서로 닫고 사는 대신 나눔의 가치, 필요의 가치를 우선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 하셨어요.

이 말씀을 들으니 나주에서 만난 어르신의 말씀이 덩달아 떠올랐습니다. 죽세공예가로 평생을 살아오셨고 지금도 역시 그리 살고 계신 분이었어요. 어르신이 만드신 모자는 하나에 3만원입니다. 당신이 하루 종일 일하시면 하루에 모자를 두 개 짤 수 있는데, 이 모자 값은 누가 매겨주는 것이 아니니 자신이 그냥 하루 일당을 6만원이라 치고 하나를 3만원으로 하신답니다. “그럼 하루 일당을 10만원으로 하시지요.” 하니까 빙긋 웃으시며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 일당은 6만원.” 하셨어요. 내가 일한 가치, 사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가치를 소박하고 당당하게 그리 삼으신 것이 멋있었습니다. 이 분이 해주신 말씀. “사람은 중심을 지켜야 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 말고. 자본주의 체제에선 어렵지만.”, “끼리끼리 살면 안 돼. 사람이 너나없이 살아야지.”

장흥 터미널 바로 옆에는 ‘자응’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자응’은 장흥을 이 지역 분들이 부르는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라 해요. 강화에 있는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고자 장흥으로 귀촌한 네 명의 청년들이 협동조합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답니다. 직접 손바느질한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따뜻한 공간이어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행복해하셔요. 저도 이곳을 찾아갔을 때 기분이 아주 좋았고요.

이분들 말고도 곳곳에서 뜻을 지키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으실 터입니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그러한 분들의 은혜로 오늘을 사는 저 또한 새해에 새롭게 마음을 일구고 제가 있는 곳에서 바르게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