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에서 돋아나는 햇순’을 어린 아이처럼 가슴에 품고 공동체성서연구원의 소식지를 펴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16년 반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듯이 한 호씩 발간하다보니, 200호를 맞이하게 되면서 떨림과 고마움이 새삼 느껴집니다.

1972년 ‘몸으로 읽는 성서’를 내걸고 공동체성서연구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개발독재 체제하에서 한쪽으로 치닫는 경제개발과 교회 성장 일변도의 추세 속에서 ‘영성과 정의의 균형’을 이루는 온전함의 영성과 에니어그램 영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공동체영성운동의 ‘깃발’이 필요하다는 이들의 요망에 따라 소식지를 펴내고자 준비한 것이 1996년 정초였습니다. 이기주의와 물신주의와 무한 경쟁이 극심하여 사회는 물론 교회마저도 공동체 의식과 영성이 척박해진 토양에서, 감히 ‘햇순’을 떠올린 것입니다.

토마스 무어가 표현한 ‘영혼의 상실’이나, 클라우디오 나란호가 말하는 ‘사회병’ Ills of the society이라는 증상, 즉 삶의 의미와 목적의 상실, 가치혼란, 몰상식, 갈등, 분열, 부조리, 폭력, 그리고 양극화 현상들로 인하여 사회적 관심과 역사의식을 지닌 이들이 아프도록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대선을 세 번 치르고, 이제 그 네 번째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영혼의 상실’이 가리키는 증상이 그동안 더욱 심해진 현실입니다. 물질적 발전의 인프라는 강화되었는지 몰라도 인문정신과 공동체성은 실종된 듯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살, 이혼, 성폭력이 이렇게 극심한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남북 관계도, 한일 관계도 전에 없이 긴장이 높습니다. 국민의 불안지수와 인내력도 임계점에 도달한 듯싶습니다. 척박한 풍토에 햇순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에 부풀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의기소침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추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희망없음’에서 솟는 법입니다. 어둠이 가장 짙었을 때 여명이 다가옵니다. 썩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마른 뼈들의 군상 속에 생명의 바람이 불면 강하고 큰 군대가 됩니다.

마른 땅, 척박한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햇순은 고운 모양도 없고 볼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돋아나는 햇순은 여리고 부드럽고 힘은 없으나 굳은 땅도 막을 수 없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시는 이의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믿기에 햇순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또 다른 200호를 향하여, 약자를 통하여 강자를, 어리석은 자를 통하여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이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나갈 것입니다. 작고 부드러운 햇순이 곳곳에서 돋아나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햇순의 연대성을 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통합을 향해 함께 가는 영성을 느낍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영성이요, ‘영성의 길이요, 함께 가는 사람들의 영성입니다!’

이제 한 획을 긋고,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굳은 것을, 느림이 빠름을,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새 세상의 비전을 봅니다. 햇순의 비전입니다. 여기서 햇순의 성격과 소명을 찾습니다.

햇순은 깨어남의 표상입니다. 나눔과 섬김, 소통과 통합의 징표입니다. 통일 이전의 사회통합은 자유와 건강과 행복의 터 위에서 이룰 것이고, 통일 이후의 더 큰 사회통합은 정의와 복지와 평화의 바탕에서 이룰 일입니다.

햇순의 비전을 공유하고 영성의 길을 함께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국 문화와 역사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Honest to God! 서는 날, 나눔과 섬김은 현실이 되고 우리의 작은 공동체나 더 큰 공동체는 세계 역사 앞에서 햇순의 진실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복되어라, 햇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