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총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핏발선 공천을 통과한 후보일지라도 이제 유권자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일꾼을 뽑아야 할 책임이 유권자에게 귀속된 것이지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편향된 시각을 스스로 교정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후보들의 조작된 이미지를 구분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좀 더 근원적인 데로 눈을 돌려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들 세계에서 믿음의 아이콘입니다. 그의 생애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의 삶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에서 망설임 없이 순종했던 것이 그를 믿음의 아이콘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을 정말 자발적인 순종으로 볼 수 있을까? 다른 시각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창세기 기자는 당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 일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시험을 받게 된 배경임을 언급하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아비멜렉과 우물을 두고 크게 다툰 일이 있습니다. 다급한 처지가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합니다(창 21:2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난 ‘후’입니다. 노름꾼이 자신의 처지가 다급해지면 땅문서 집문서 내놓고 맹세합니다. 그도 안 되면 ‘마누라’를 걸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께서 ‘맹세에 대한 교훈’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말라. 땅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네 머리로도 말라.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마 5:34-37).

우리가 하나님을 관념적으로는 ‘신실하게’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다급하거나 선거판과 같은 구체적인 현실에 부딪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게다가 가나안 지역은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악습이 성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다급한 위기를 만난다면 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맹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험성을 아시고 시험하신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로 받은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생각만 하여도 소름 돋는 일입니다. 이 모순되고, 비윤리적이고, 피눈물 쏟게 하는 시험은 아브라함이 자초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결코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초한 것과 같은 시험이 복음서에도 나타납니다. 저 유명한 변화산에서의 일입니다(마 17:1-13). 베드로는 너무나 황홀하여 그곳에 머물기를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산에 머물고 싶어 하는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 동네로 내려오십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이 하나님을 자기 삶의 방편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의 시험은 예수를 풍파 많은 세상에서 황홀한 세계로 끌어올리려는 것이지요.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유혹 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생명 세계는 꼿꼿하게 서서는 보이지 않고, 돌볼 수도 없습니다. 몸을 굽혀야 보이고, 돌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초월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당신의 몸을 굽혀 세상으로 내려와 뭇 생명을 보살피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꼿꼿하게 서서 지배한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돌보는데 결정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몸 굽히는 헌신입니다. 자기희생입니다. 예수를 대적한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는 자기희생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습니다. 세상이 소란스러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죽음의 기운이 발밑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예수의 이 말씀은 생명의 질서에 대한 정언입니다. 예수께서는 생명의 삶, 평화의 길을 몸소 사시고 또한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몸 굽혀 생명을 사랑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