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수상합니다. 날씨까지 을씨년스럽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신의 망령들이 백주대로를 활보하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습니다. 권력 실세들의 적반하장이 가관입니다. 민생 운운하는 입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겸양은 찾아보기 어렵고 파렴치가 득세합니다. 기회를 놓칠세라 내놓고 유신을 찬양하고, 독재를 미화하는 언설이 난무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독재하셨다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다수의 유권자가 선택한 결과인 것을. 잠시 격정을 내려놓고 각자의 인생을 반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 있는가”(전 1:2-3) 전도자는 지금 허무를 읊조리고 있습니다. ‘영원’을 상실한 채 찰나의 ‘시간’에만 매달려 사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도자는 우리에게 ‘때’의 소중함 일깨우고 있습니다. ‘때’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키-워드입니다. 인간은 정해진 ‘때’를 초월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마다 영원을 사모하며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때에 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때’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성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 누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서산에 기우는 해를 누가 되돌릴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때’에 대한 인식은 삶의 한계를 자각하도록 합니다. 각 사람에게 ‘때’는 항상 ‘상극적’입니다. ‘때’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도 일어납니다. 출산의 기쁨은 해산의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만남의 기쁨은 헤어짐의 쓸쓸함이 따릅니다. 때문에 비록 힘겨운 일이 닥칠지라도, 그것을 삶을 이루는 과정으로 수용하라는 게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를 잘못 받아들여 숙명론에 빠지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점술, 복술, 무당굿 등은 카이로스의 때를 크로노스의 때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얄팍한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허무맹랑한 점복이나 푸닥거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감히 때를 조작하려는 만용도 경계 대상입니다. 역사를 떡 주무르듯 하는 것이야말로 오만의 극치입니다. 그런 이들이 득세할수록 나라든, 사회든, 교회든, 공동체의 삶을 경박해집니다.

허무한 인생, 정해진 때를 벗어날 수 없는 인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골 3:12). 때를 살아갈 능력을 ‘개발’하라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요, 역사 앞에서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3-14). ‘때’를 사는 사람치고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용서야 말로 ‘때’를 사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윤리와 도덕의 기준점이 됩니다.

바울은 또 우리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 3:16)고. 삶은 승화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강대국에 의해 참혹한 일을 겪을 때마다 원한의 격정을 누그러뜨리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과를 먼저 실토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수의 일념보다 자신들의 죄악을 먼저 용서받는 게 그나마 내일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죄과는 은폐하고, 원수만을 향한 적의에서 역사의 불행은 되풀이됩니다. 우리가 아직도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분단의 비극을 해소하지 못한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입니다. 시작도 역사이고, 끝도 역사입니다. 인생도 역사도 시작과 끝 ‘사이’에 있습니다. 삶이란 끝을 맺어주고 시작을 열어주는 일상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망각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시절이 어수선할 때일수록 삶의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동화 한 편을 권합니다. 권정생 지음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입니다.

소쩍새 우는 봄 밤, 치악산 골짜기 달빛 아래 오푼돌이 아저씨와 곰이는 마주 앉아 6. 25 전쟁 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릴 적 고향 이야기도 나누고, 인민군인 오푼돌이 아저씨는 국군과 싸우다 죽고, 곰이는 피난길에 죽게 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오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환상으로 보게 된다.

원래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이야기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 등장하지만 여기에서는 두 마리가 등장한다. 이 부분이 이 작품의 핵심이 된다.

“해순아, 달순아, 엄마 왔다. 문 열어라.”
누나와 동생은 얼른 뒷문 쪽으로 갔습니다.
“엄마가 왜 뒷문에 와서 부르는 거야?”
누나가 말했습니다.
“앞문엔 호랑이가 있단다. 그래서 여기 뒷문으로 왔지.”
“하지만 엄마 목소리가 아닌 걸.”
동생이 도리질을 했습니다.
그때, 앞문 쪽 호랑이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얘들아, 뒷문 쪽에 있는 건 가짜 엄마야. 속지 말아라.”
오누이는 앞문 쪽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뒷문 쪽 호랑이가 속삭였습니다.
“거짓말이야, 앞문 쪽에 정말 호랑이가 와 있단다. 이쪽으로 오너라.”

할머니를 잡아먹고 오두막집의 앞문과 뒷문에 나타난 두 마리의 호랑이는 방 안의 오누이를 두고 서로 거짓말을 한다. 호랑이에게 속아 넘어간 오누이는 서로 다투다가 결국 앞뒷문을 열어 주고, 두 마리의 호랑이는 좋아라고 누나와 동생을 물고 멀리 달아난다.

미국 믿지 말고 소련 속지 마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하세

옛날 어렸을 때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호랑이들아, 엄마를 잡아먹었으니 달순이 해순이는 살려줘. 그리고 너희는 먼 데 너희 집으로 돌아가!”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는 달빛 밝은 치악산 골짜기에서 오늘 밤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참 묘한 위치에 놓여 있어서, 북쪽에서는 대륙세력이 내려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남쪽에서는 해양세력이 또한 끊임없이 기를 쓰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려 한다. 그 다리목에 우리나라가 있는 거다. 그래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권정생 선생이 쓴 작품이 바로『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이다.

평생 병고에 시달리며 가난하게 살다 가신 권정생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많은 유산(작품과 인세)을 남기셨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배고픈 북한 어린이에게 먹을 것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