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합니다. 짙푸르던 나뭇잎들은 하루가 멀다며 변하고 있습니다. 나뭇잎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제 역할을 다하느라 분주한가봅니다. 제 시절 만난 듯 호기를 부리던 권력의 속살이 드러나고 보니, 온 나라가 마치 사이비 교주에게 농락당한 것 같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선실세를 교주처럼 의지한 가련한(?) 대통령을 위로해야 할지, 그런 이를 대통령으로 모신 국민을 위로해야 할지. 아니면 대통령 말씀 충성스럽게 받아 적는데 열중했던 청와대 참모들과 각료들을 위로해야 할지, 대통령 호위무사가 되어 목숨 건 단식도 불사했던 당 대표를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갈했던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을 아마 ‘최순실’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역시 하늘 아래 온전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 치고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란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감히…!’ 라고 찌푸린 얼굴은 자가당착을 불러들입니다. 맹목적인 충성심 그리고 맹목적인 사랑의 열정은 올곧은 사람을 배반자로 낙인찍습니다. 함께 가야할 동료를 적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열정으로 하는 일일지라도, 자기모순과 잘못에 대한 개연성을 항상 열어놓아야 합니다.

사회학자 리스먼 David Riesman은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에서 신앙 양심에 의해 자기 자신을 성찰해가며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개척정신이 나오고, 창조정신이 나오고, 나아가 이타적인 사랑이 사회화된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자기 내면에 어떤 신앙적인 규범도 없고, 죄의식도 없는 사람은 죄를 말하기는 하지만 자기 죄는 말하지 않고, 타인의 죄만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제3자화법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공적인 직무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8-9)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닌 학습을 통해서 배웁니다. 내게 사랑의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이 내 안에 있을 때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행위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사랑의 불씨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화되지 않은 사랑은 참된 의미에서 아직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내밀하게 작용하는 사랑은 밀의종교로 퇴행하기 쉽습니다. 그런 연유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행위가 된다는 측면에서 사랑도 공공성을 지녀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공직자의 맹목적인 사랑은 그가 속한 사회에 치명적인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곁에서 도와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할만한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이 제거됨으로써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열정이 성숙해야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비극은 성숙하지 못한 사랑의 열정으로 나라의 공적 직무를 장악했다는 데 있습니다. 더하여 비루하게 그런 대통령을 교주처럼 섬기면서 제 잇속만 챙긴 ‘가까운’ 사람들과 참모들이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성숙한 나라는 개개인의 사랑이 사회로 확대되고, 제도로 정착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숙한 나라의 권력은 통수권자를 사이비교주처럼 섬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나라 안의 연약한 이들,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억울한 이들을 적극 부조하고,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일을 의무로 여깁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처럼, 권력이 국가의 권위를 앞세워 억울한 이들을 회피하거나 괴롭히는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미개한 나라입니다. 성숙한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할 권력을 비루하게 만든 게 박근혜 정부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박근혜 정부의 비극’이 ‘대한민국의 비극’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으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