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들로 둘러싸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살벌한 세계에서 가정, 사회, 국가, 교회 등 크고 작은 공동체의 희망은 어떻게 가꿀 수 있는가? 저 옛날 예언자 스가랴의 말입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슥 8:16-17)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먼저 귀환한 백성들은 총독 스릅바벨을 중심으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들의 실추된 자존심과 상실된 희망을 성전재건을 통해 회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스릅바벨의 정적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 사마리아사람들 등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스릅바벨은 더욱 강력한 의지로 성전재건을 감행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는 자들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백성들을 설득하고, 저들의 어려운 사정을 귀담아 들을 생각은 안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라도 정적들의 기세를 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강요된 질서’ 가운데서 백성들은 점차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국론은 분열되고, 처음 지녔던 희망은 낙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꽉 막힌 정국에서 예언자 스가랴는 스릅바벨을 향해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인간이 쌓은 것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임을 경고합니다. 나라 지도자들이 거짓과 분열을 버리고 진실과 화평을 회복해야 희망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의 어려운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사례를 사도행전과 복음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일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심각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난 건 말할 것 없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가 단호하게,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오랜 논의 끝에 내린 결론: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 공의회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특정인의 뜻이 아닌 성령을 주목한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앞의 스룹바벨과는 전혀 다른 행보입니다. 이런 건강한 환경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복음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를 활기차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신 것도 그렇습니다(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면 옛 시리아 제국을 다스렸던 페니키아 후예입니다. 어쩌면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요, 지체 높은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병든 딸로 인해 근심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와의 관계에서 여인은 이미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자비를 베푸는 쪽에서 ‘그래 알았다, 내 고쳐주마!’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딸을 고치기 위해 대화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절대 우위에 있으면서도 그걸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약한 자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하신 것입니다. 이럴 경우 대화는 치유를 위해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최근 생태운동을 하는 최재천 박사가 ‘협력의 역설’이라는 칼럼에서 철천지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여의도 정치를 두고 한 말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2020년 대한민국에 필요한 최고의 덕목은 도덕성, 창의성, 근면함이 아니라 마주 앉아 이야기하며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020. 6. 16. 조선) 유발 하라리 역시 [호모 데우스]에서 (수많은 영장류 가운데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낯선 사람과 유연하게 협력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남북 관계처럼 마음의 교환 없이 사진 찍기 위한 대화는 반드시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국제간에 파생된 수많은 어려운 문제의 해결에도,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남과 북의 관계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