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철에 서울에서의 목회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간 선배한테서 고구마 한 박스를 택배로 받았다.
한동안 즐겨 먹었는데도 박스 안에는 고구마가 절반쯤 남아있었지 싶다.
한 달도 더 지나 박스 안을 들여다보니, 이런! 고구마에서 싹이 나는 것이 아닌가?
연한 순에 짙은 보라색의 고구마 싹이 그렇게 이쁜 줄 처음 알았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아 이 고구마가 생명력이 있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이놈들을 뜨거운 불에 구워먹고 삶아먹고 생으로 깎아먹고 그랬네...ㅠㅠ”
큰 접시에 물을 흥건히 담아 올려놓았더니 줄기의 성장이 장난이 아니다.
나의 생명 보는 눈이 어두워 그들 안에 담겨진 생명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은 낙엽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하긴 낙엽도 가을철 생명을 다하고 떨어진 시체쯤으로 여기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물론 과일도 제 철이 있고, 어떤 일마다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필이면 더워지기 시작한 초여름에 낙엽 찬가라니...
이제 막 이파리를 키우고 초록색 싱그러움을 잔뜩 뽐내는 잎사귀들한테는 좀 심술궂은 제목이긴 하지만, 그래! 오늘은 낙엽 얘기를 해보자.

때는 올해 4월 2일, 그 날은 어머니 기일이다.
십수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충남 공주 한 작은 동네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렸다.
어머니 시신을 모신 영구차 안에서 바라보는 시골 들녘은 온통 대지의 생명력으로 가득 찬 4월이었다.
죽음과 삶은 이렇게 우리 속에 늘 공존하는 것이라는 걸 그 때 느꼈었다.
올해도 4월 2일에 성묘를 다녀왔다.
산소 주변의 떼들은 이젠 보수가 필요할 만큼 군데군데 죽어 있었고, 그나마 지난 가을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잔디들을 덮고 있는 탓에, 햇빛도 못 받고 더 죽을까 싶어 못된? 낙엽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아! 참 신비로운 일이다.
한철 싱그럽던 잎이 가을철이 되면서 늙어 낙엽이 되고, 이젠 쓸모없이 땅을 뒤덮고 있어서, 봄철 새로이 자라는 잔디나 새싹들의 성장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낙엽들을 걷어 내다보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주 작고 여린 새싹들이 낙엽을 지붕삼아 매우 싱싱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낙엽 아래에서 새싹들이 자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연의 이치는 참으로 신비롭다. 아니,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참 지혜롭다.
여리디 여린 새싹들이 차고 딱딱한 땅을 뚫고 올라온다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지만, 봄날의 뜨거운 햇빛에 노출되면 땅이 쉽게 말라 새싹들이 이내 말라 죽을 것이고, 아직은 꽃샘추위에 약한 새싹들인데 바람이나 추위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바로 낙엽들이 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새싹이 낙엽 틈을 비집고 나오게 되면, 이젠 그 낙엽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아! 낙엽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

낙엽을 걷어내니 그 속에 여린 떡잎 하나!
또 하나 걷어내니 그 속에도 어린 새싹 하나!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어디 하나라도 있을까?

벌써부터 목덜미에 땀이 차는 초여름이다.
지금 대지위의 푸르른 잎사귀들도 머잖아 가을이 되면 누렇게 변색된 자신을 떨굴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생명의 그늘이 되고, 보호자가 되고, 그들 세상의 자양분이 되는 순환의 몫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인생들이여, 푸르름에 교만하지도 말고, 낙엽됨을 슬퍼하지도 말자.
낙엽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비로소 누군가의 인생에 매서운 바람과 뜨거운 햇빛과 짓눌림을 막아줄 그늘이 된다는 것을.
옛날 내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셨던 스승님들, 그러나 지금은 다 낙엽이 되어 이 땅을 떠나신 스승님들처럼, 이젠 내가 그 분들의 역할을 감당할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자각하며, 땀이 차는 초여름에 생뚱맞은 낙엽 찬가를 불러본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12:23-2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