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안타까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피해자에 대한 기억 없는 애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불행 이면에는 겉은 민주화 되었지만 본능과 관성은 여전히 민주화에 적응하지 못한 권력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비서에게 살아 있는 권력의 속옷 시중까지 들게 하는 전근대적인 폐습이 일생 인권운동에 헌신한 사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저 옛날 이사야는 “통치자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풍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이다.”(사 32:2) 라고 했지만, 피해 여성에게 통치자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은 역설적으로 땅의 백성들이 통치자들로부터 얼마나 시달림을 받고 살았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를 은인이라 청함을 받으나…”(눅 22:25) 라고 냉소적으로 말씀하신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지배하면서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 억압하면서도 시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게 권력자의 속성입니다. 고용주들도 노동자에게 밥 먹여주는 사람으로서 은인입니다. 전에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이 했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된 일이 있습니다. “사장님이 같이 살아야 저도 산다는 생각에서 (알바 월급을) 떼였지만 노동청에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어떤 공동체 의식이, 같이 함께 살아야 된다, 이런 게 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용주를 은인으로 여기는 의식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사 32:16-17/표준새번역) ‘광야’가 궁핍한 곳이라면, ‘기름진 땅’은 넉넉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광야처럼 살기 어려운 환경, 안보 위협이 팽배한 환경이나 시대에는 불가피 정의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에게 ‘광야’와 ‘기름진 땅’은 동일하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땅입니다. “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는 정언 역시 우리의 생각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평화가 깃들어야 비로소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 곧 정의가 뿌리 내려야 평화가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평화는 ‘정의’가 뿌리내린 데서 맺는 결실입니다.

연전에 한 살인용의자가 체포된 소식과 관련해서 어느 기자가 시민을 상대로 인터뷰한 일이 있습니다. 살인용의자가 부자들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던지, 강남의 어떤 아주머니의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을 증오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살인용의자가 자본주의를 이해 못한 게 잘못이라는 것인데, 이 아줌마 역시 자본주의를 이해 못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야말로 경제 정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발 뻗고 살 수 없는 정글사회가 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순천의 어느 매실밭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유병언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자연의 풍광과 숲의 생명들을 지속적으로 사진으로 찍어 전시했습니다. 그의 자연 사랑은 농장경영에서도 나타납니다. 전국에 10개에 이르는 농장을 사들여 운영하고, 프랑스에서는 농촌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매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히 에덴동산을 꿈꾼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조력하던 자들이 다 잡혀가거나 도망가 버리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자연은 그를 따뜻하게 품어준 것 같지 않습니다. 당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문화비평가 황현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가장 작은 일까지도 시중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던 그 귀한 사람은 그들의 손을 놓자마자 더할 나위 없이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황현산, 경향, 14.8.2).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눅 22:27). 시중드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분, 그분이 예수십니다. 지배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들의 나라. 우리가 바라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피해자께서는 용기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