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끼

지난해 초겨울, 사람들이 이상기후라 수군댔다. 해안 쪽으로는 눈이 많이 내려 곳곳에 비닐하우스 무너지고, 길은 막혀 마을이 고립되고 여간 난리가 아니라 했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문 들려올 때, 장말로 시집간 막내딸, 겨우내 우리 엄니 등 따습게 입으라고 누비조끼 하나 둘둘 말아 장꾼 편에 보내왔다. 안팎이 검정색 나일론 천인데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듬성듬성 누빈 것이 품도 넉넉한데다 기장까지 엄청 길어 허리 자나 엉치뼈 아래까지 덮었다.
오매나 복닥한 거, 오매나 도톰한 거, 오매나 보드란 거, 할멈은 좋아라고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오매나 매끈한 거, 입었다 벗어놓고, 개켜놓고 바라보고, 벼르기만 하는 것을
“내 쪼까 입어보까나.”
할아버지 슬그머니 이쪽저쪽 팔을 꿰고, 단추까지 채워보고, 주머니도 깊숙허네, 두 손 모두 찔러보고, 담뱃갑 라이터도 이쪽저쪽 넣어보고
“가볍고 복닥한 것이 할멈보다 좋네그랴.”
하루 종일 벗지 않고 잘 적에도 입고 자고 마실 갈 때도 입고 가고 겨우내 뭉개더니 개나리 진달래며 봄도 이제 깊었건만 그냥 입고 짓뭉갠다.
“여보 영감!”
“왜 불러?”
“지발 그 조끼 좀 벗어놔유.”
“길 떠날 사람이 왜 밍기적거리믄서 조낀 또 벗으랴, 시방.”
“날씨 다 풀렸는디 왜 그걸 못 벗어유?”
“등이 아직 후텃혀서 좋은디?”
“벗어놔두 인자 내 안 입어유. 겨우내 뒹굴었으니 냄샌들 오죽헐까.”
“허긴 그려.”
“말 나온 김에 당장 벗어유. 아예 주물러 널구 가게스리.”
“그야 뭐 어려운 일잉감.”
할멈 성화 하도 불같아 할아버지 실로 오랜만에 조끼를 벗는구나. 양쪽 주머니에서 담뱃갑 라이터 꺼내놓고, 지갑이며 동전이며 신문지 쪼가리도 꺼내놓는다. 와이셔츠 흰 단추며 나사못도 하나 더 나온다. 길 가다가도 할아버지는 눈에 띄는 족족 무엇이든 나중에 쓸 곳 생각 않고 주워 넣는 버릇이 있다. 그래놓으니 늘 그 주머니 불룩하다.
“이걸 다 어디다 담나.” 할아버지 혼잣말에
“아주 큰 걱정거리 하나 생겼수. 인자 좀 소용 닿지 않는 건 버리기두 허며 사슈.”
못이기는 척, 어렵사리 벗어놓은 조끼를 할멈이 집어 든다.

한 보름 집 비우는데 할멈은 할 일도 많고 걱정도 많다. 묵은 짠지 썰어놓고 무말랭이 고춧잎 섞어 짭짤하게 무쳐놓고 마른반찬 밑반찬에 짠 반찬까지 갖춰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간장게장까지 담가놓고
“귀찮다고 조석끼니 거르지 마슈. 후다닥 마실 내빼서 남의 집 식구 귀찮게 허덜 말구, 일일이 따끈한 밥 쌀 한 주먹씩 안쳤다가…….”
“허허이, 무슨 심봉사 혼자 두고 심청이 인당수 가는가. 딸내미 해산관 하러 간다믄서 아주 가는 사람 같네그랴. 임자나 잘 댕겨오더라고.”
말은 그리 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할멈은 이어 요강도 씻어놓고 고무신도 뽀얗게 닦아다 마루 끝에 엎어 놓고 장독대도 둘러보고 기어코 조끼까지 빨아 헹궈다 빨랫줄에 널어놓고 짐꾸러미 챙기는데
“그건 다 뭣인고?”
“뭔 뭐유. 산모 첫국밥 끓여줄 미역이쥬.”
“미역뭉텡이가 그렇게 커?”
“그 애랑 사우 잘 먹는 거 쪼매씩 쌌쥬.”
“돈 주면 지천인걸, 먼 길 가믄서 무슨 짐이 그리 많여?”
“영감이 사온 미역, 짠 무시 한 토막에 참기름 한 병…….”
“미역이사 그렇다 치구, 짠무시는 또 뭐여?”
“별걸 다 신칙허신다……. 약주 많이 들지 말구 주무실 때 장독 덮구 더워두 군불 때구 비설거지 잊지 말구…….”
“헌 말 하고 또 해쌓네.”
“아이구, 내가 망녕일세. 영감이 뭐 어린앤가.”
“그야말루 남말 허네.”
“댕겨올규.”
장말 쪽으로 나가는 버스 시간 임박해서야 할멈은 허겁지겁 사립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