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성서연구


	3/2008	목차 (2008년 3월호, 제145호) :햇순:을 읽고.. 편지로 띄우는 말씀 / 공동체성서연구자료 / 성서난해구 해설 / 공동체만들기 오늘을 바라보며 / 말씀과 삶의 뜨락 / 현장의 소리 / 강정규 연재동화 영성생활에 도움되는 책 / 에니어그램영성 / 공동체소식 / 공동체 이야기

강정규 연재동화

낮 달 (6)

강 정 규

동화작가,
"시와 동화" 발행인,
한국아동문인협회장,
단국대 초빙교수.

강이라지만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우물을 파면 짠물만 나왔다. 먹는 물은 산아래 안동네에서 길어다 먹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차례 물난리를 치렀다. 지대가 낮기 때문이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산아래 안동네로 피난을 가곤 했다. 우리집은 그래도 거기 큰댁이 있어 덜 불편했다.
“마누라는 읎어도 살지만 장화읎인 못사는 동네여.”
어른들이 공회당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말했다. 들판엔 황토물이 벙벙했다. 물이 빠지고 피난에서 돌아와보면 장판바닥에는 감탕흙이 한뼘이나 쌓여있고 울타리에는 물뱀들이 기어올라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생 난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난리였다.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정례네는 어느 날 밤 자취를 감추었다. 유성기, 라디오, 전화기 등 없는 것 없는 살림살이를 모두 그냥 놔두고 몸만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정례네 집은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됐다.
순덕이 아버지는 여전히 물지게를 졌다. 사람들이 많이 들고나니 하루종일 등에서 물지게를 떼어놓지 못했다. 그러나 기관수인 개똥모자는 여전히 기름때 묻은 개똥모자를 쓴 채 팔뚝에 완장을 하나 두르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방앗간 기계는 물론 돌아가지 않았다.
순덕이 동생 또남이가 푸른똥을 싸다가 소리소문 없이 그냥 죽었다. 그뿐 순덕이네는 변함이 없었다. 순덕이 엄마는 인민위원회에 가서 사람들 밥을 해준다고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부엌에다 방공호를 파고 있었다. 우리집 대장간 화덕도 불이 꺼진지 오래였다.

논보리를 갈면 겨우내 오리떼가 극성이다. 여린 보리싹을 파먹기 위해 떼지어 날아온다. 허수아빌 세워도 허사다. 대나무 장대를 메고 들판으로 나간다.
“같이 가자.”
순덕이가 말했다.
“춥지 않니?”
“응.”
나도 잘됐다 싶었다. 주머니 속에 성냥이 한갑 들어있기 때문이다.
가끔 순덕이는 우리 집으로 불을 얻으러 오곤 했다. 화롯불이 꺼지면 난리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 순덕이 주려고 성냥 한갑을 준비해 두었던 거다. 들판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 밤에 오리떼는 보이지 않았다. 논 귀퉁이에 쌓아 놓은 퇴비용 짚가리가 보였다. 바람막이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거렁뱅이가 자고 갔나, 피난민이 쉬다 갔나.”
순덕이가 말했다.
짚가리 한 귀퉁이가 무너져있었던 거다. 짚토매를 뽑아 방처럼 꾸며놓은 게 보였다.
“왜 오리가 안 오지?”
“오리들도 난리난 걸 아나?”
“성냥 줄께.”
“성냥? 그래 줘.”
순덕이 눈이 반짝 했다.
“알이 꽉 찼네.”
“응. 벽장에서, 새거, 꺼냈어.”
몰래, 널 주려구는 삼켰다.
“우리 의사놀이 하까?”
순덕이가 말했다.
“여기서? 지금?”
“응, 어때?”
순덕이가 내 눈을 보았다. 오리는 오지 않고 다른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거기서 순덕이의 섬이 보였다. 나무들이 모두 잎을 떨구고 갈대숲도 시들어 쓰러지고 꺾이고 볼품이 없었다. 나는 순덕이의 섬을 건너다보고 있고 순덕이는 그러고 서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오리떼가 날아와 보리싹을 뜯어먹고 있었다. 꾹꾹거리는 소리가 소란하고 오리들이 물결치듯 움직이는게 보였다.
“오리떼가 왔네.”
“응?”
“이러다가 혼나겠다.”
나는 들판으로 장대를 휘두르며 뛰어갔다.
순덕이가 짚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속)

120-802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152-28 2층 Tel 02)312-6803, Fax 02)374-7277
cbsi@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