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성서연구


	4/2008	목차 (2008년 4월호, 제146호) :햇순:을 읽고.. 편지로 띄우는 말씀 / 공동체성서연구자료 / 성서난해구 해설 / 공동체만들기 오늘을 바라보며 / 말씀과 삶의 뜨락 / 현장의 소리 / 강정규 연재동화 영성생활에 도움되는 책 / 에니어그램영성 / 공동체소식 / 공동체 이야기

강정규 연재동화

낮 달 (7)

강 정 규

동화작가,
"시와 동화" 발행인,
한국아동문인협회장,
단국대 초빙교수.

“일꾼양반이 돌아온대유.”
강 둑에 정자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옆에 팔각정이 있었다. 어느핸가, 마을에 큰 물이 졌을 때 떠내려온 나무를 그냥 심심파적으로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 잎을 피우고 가지를 뻗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옆에 사람들이 일하다 비도 피하고 새참도 먹을 수 있도록 정자를 지었다고 했다. 그 정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나는 이미 보았다. 수수깡안경 밖으로 곧고 하얀 신작로, 차돌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길을 처음엔 작은 점 같이 나타났다가 먼 빛으로, 선홍빛으로 물든 바지저고리를 걸치고, 길 양쪽으로 어우러진 아카시꽃 냄새 어지러운 한길을 걸어오는 사람. 흰 무명바지와 광목 적삼이 온통 핏빛, 아니 자운영 빛, 아니 천방산 먼 산 나무 갔다가 전 친 솔가루 짐에 꽂혀 오던 진달래꽃 빛이랄까, 순덕아버지는 그렇게, 마치 이사오던 그 날같이 머리는 질끈 무명수건으로 동여매고 나무다리를 건너 절뚝거리며 저만치 가까이 오고 있었다.
손수건은 꼭 흑장미빛이었다.
사람들은 멍하니 쳐다볼 뿐 누구하나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 눈앞을 순덕아버진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눈을 허공에 두고 물길어 대던 방앗간 집 정례네를 지나, 우리집 판자 울타리를 끼고 돌아 둠벙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아버지가 엄마에게 말했다.
“인민위원장이 말여, 어느 날 밤이 정례아버지를 찾아 왔대야. 그리구 이렇게 말했다는 구먼. 우리의 숙청 대상은 일제 앞잡이 악질 경찰과 인민을 수탈한 악질 지주입네다. 그러나 이 혼란스런 와중이 그 선별이 어렵습네다. 내일 모레 인민재판이 열리는데 어르신이 참석하믄 반드시 누군가가 불러낼테니 오늘 밤으로 피하시기 바랍네다.”
아버지는 정말 인민위원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리의 숙청대상은……할 때는 목소리를 한껏 깔며 실감나게 말했다.
“그래서유?”
“그런디 놀랍게두 순덕애비가 정례 아버지를 숨겨 살려냈다지 뭐여.”
“워떻게유?”
“창고 속이 일정때부터 비밀굴이 있었다나 워쪘다나. 자세한 속내야 내가 워떻게 알것어?”
“식구들은유?”
“아, 식구들이야 애들서껀 외갓집게 가 있었겄지 뭐.”
“아, 그런디 왜 죄읎는 순덕애비, 아니 그 착헌 일꾼양반은 잡어다 그렇게 조져놨대유? 이편쩍이나 저편쩍이나 물길어다 댄 죄배끼 읎구, 거기다 정례아버지 같은 으른꺼정 숨겨줬다는디…….”
“그 속을 내가 워찌 알것어. 그런걸 알문 내가 면장 허겄네, 뭐.”
“면장은 아무나 허냄유.”
“그렁게 말여, 어서 불이나 꺼.”
“장독에는 똥물이 젤유.”
사람들이 말했다.
“맞어, 장독(매맞아 골병든 데)에는 똥물이 약이랴.”
똥물도 그냥 똥물이 아니라 오래 묵은, 그것도 남정네가 주로 드나드는 큰 길가 것이라야 효험이 있다했다.
우선 커다란 유리병을 깨끗이 닦아놓고 솔잎을 따다 병 주둥이를 미어지게 틀어막는다. 그리고 길다란 줄로 병목아지를 묶는다. 거기 돌멩이를 매달아, 그 무게로 똥물 속에 가라앉게 한다. 줄을 가늠하여 가능한 한 병을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한 쪽 끝을 뒷간 기둥에 묶어 놓는다. 실은 왕대를 잘라 똥통 속에 담갔다가 마디 마디 절로 고인 물을 먹어야 진짜 약이 되는데 그것은 똥물이 고이는 시간이 느려 급한 환자에겐 소용없다 했다.
돌멩이 매달린 병은 빈병이지만 돌무게로 변소 밑바닥에 가라앉은 채 서 있고, 곰삭은 똥물은 솔잎과 솔잎 틈으로 스며들어 한 방울씩 병 안에 고이게 마련이다.
얼마 후 건져올린 유리병엔 마치 폭 익어 가라앉은 술독에 용수를 박아 떠낸 청주같이 투명한 똥물이 가득 차 있었다. 순덕이는 우선 병거죽을 깨끗이 씻어내고 솔잎마개를 뽑아냈다. 그리고 사기 대접에 똥물을 반넘게 따랐다. 그걸 개다리 소반에 받쳐들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부지, 약 드서유.”
순덕이가 무릎꿇고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순덕어미는 순덕어미대로 어디서 구렁이를 한 마리 잡아다 둠벙가 대추나무 가지에 매달고 찬송을 부르며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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