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그 시간에 꽁꽁 묶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무려 50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고, 937명이 부상을 입은 어이없는 대형 참사. 만약 그 날 그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 건물 안에 있었다면, 그러다가 기어이 그 사고를 당한 거라면, 내 기억이 그토록 무심하게 그 일을 망각할 수 있을까요?

지난 가을에 개봉되었던 영화 <가을로>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지요. 결혼을 코앞에 둔 예비신랑 현우(유지태 분)는 예비신부 민주(김지수 분)를 만나러 삼풍백화점으로 향합니다. 말단 검사인 그는 자기를 찾아온 민주더러 백화점에 가서 기다리라고 억지로 등을 떠밀었어요. 마침내 여섯 시. 민주는 현우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며 지하다방에 앉아 있습니다. 겨우 일을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온 현우는 백화점 앞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고요. 바로 그 때, 콰르릉 무너져 내린 백화점.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기막힌 광경 앞에서 넋을 잃은 현우. 검은 먼지와 재를 뒤집어쓴 그가, 민주야, 대답 좀 해봐, 중얼거리며 건물 잔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은,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까지 내려간 오르페우스만큼이나 처절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현우의 삶도 덩달아 무너진 거네요. 현우에게 시간은 그렇게 그 해 여름에서 딱 멈추어 버렸습니다.

냉혈한처럼 굳은 표정으로 일중독에 빠진 현우에게서, 민주가 그토록 좋아했던 환한 미소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민주와 함께 있을 때 그가 얼마나 따스하고 섬세하고 유머러스했던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충분히 알아차릴 거예요. 지금 현우의 저 무감각한 표정은 죽을 것 같은 절망을 참으면서 겨우겨우 살아내는 증거라는 것을요.

민주를 잃고도 현우는 그네들의 신혼 보금자리로 장만한 아파트를 떠나지 못합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은 보기에도 민망하네요. 민주에게 현우가 어설픈 프러포즈를 하던 날, 천장의 전등이 깨져 있는 걸 보고 민주가 웃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전등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멈춰 선 시계, 텅 빈 냉장고, 폭탄 맞은 것처럼 어수선한 집안 풍경은 현우의 내면과 꼭 닮았군요.

삶도 일도 모든 게 엉망진창, 도무지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는 한계상황에서 현우 앞으로 한 권의 다이어리가 배달됩니다. 펼쳐보니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라고 쓰여 있네요. 아, 이 다이어리는 바로 민주가 죽기 직전에 백화점 다방에서 예쁘게 포장하던 현우의 선물이었던 거지요. 현우는 그 다이어리에 적힌 순서대로 혼자서 여행을 떠납니다. 전남 목포 끝 우이도 사막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는 7번 국도를 거쳐, 마침내 담양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에서 끝나지요. 불모의 사막에서 푸르른 오아시스로……. 그러니까 민주의 선물은 다름 아니라 현우의 상처 입은 내면을 치유해주려는 속 깊은 배려, 그것이었네요.

언젠가 민주가 먼저 걸었던 그 길 위에 현우가 서 있습니다. 여행 중에 운명처럼 만난 여자 세진과 함께요. 그로 말하자면, 어찌어찌 민주가 죽던 순간에 그 곁을 지킨 생존자이니, 이들의 인연이 운명이라 할 밖에요. 마지막 장면에서 내레이션으로 나오던 민주의 말이 인상적이네요. “새로 포장한 길인가보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 텐데. 사람들은 그 길을 잊고 이 길을 또 달리겠죠? 좋은 길이 됐으면 좋겠다.” 예언과도 같은 이 말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우와 세진에게 주는 민주의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그 해 여름에서 정지되었던 시간이 마침내 가을로 흘러갑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산다는 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지요. 죽은 자에게는 시간 개념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참으로 산다는 건 시간의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온갖 요인들에 맞서 싸운다는 뜻이겠네요.

현우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혀 계신 분들이 이제 그만 시간의 마법에서 풀려나기를 소망합니다. 새해입니다. 무작정 희망을 품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이 은혜로운 계절에 생명의 용기를 가지고 새 길 위에 서는 지혜로운 벗 賢友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