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자가 막 “엄마”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손자에게 “할머니”라는 말을 한 번 시켜보았더니 “하미”라고 한다. 비록 어렵고 어눌하게 하는 발음이었지만 나는 계속하여 그 단어를 반복하여 말하게 가르쳤다. 매일 같이 그 손자를 안고서 “나 누구야?”를 묻곤 했다. 그러면 손자는 “하-아-미”라고 따라 한다. 그 말만 들어도 나는 행복했고 흐뭇했다. 어린 아이에게 날마다 “나 누구야?”를 반복해서 묻는 것을 본 내 남편은 힘든 수업을 강요당하는 손자가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할아버지”라는 말보다 “할머니”라는 말을 먼저 가르치는 것에 심통이 났는지, “내가 누구인가”라는 그 어려운 철학적 질문을 어린아이에게 매일같이 해대면 그 아이가 그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느냐고 내게 핀잔을 준다. 그러나 그런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자에게 할머니라는 발음을 줄곧 연습시켰고 아이가 그 말을 비슷하게라도 따라서 하면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가슴 벅찬 환희를 느꼈고, “할머니”라는 칭호는 아무리 들어도 지루할 수가 없었다.

손녀가 생기면서 우리 손자는 “오빠”가 되었다. 우리 손자는 “오빠”라는 칭호가 마치 자기 혼자만의 호칭인줄 알 정도로 “오빠”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집 며느리는 아직도 자기 신랑을 오빠라고 부른다. 그러면 우리 손자는 “엄마, ‘오빠’는 난데, 왜 엄마는 아빠를 오빠라고 불러?”하고 묻는다.

우리 손녀가 이제 막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하루는 우리랑 같이 점심을 먹은 후 이제 외갓집에 간다고 하면서 나보고 “할머니, 할머니도 사부인 댁에 같이 가실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사돈댁에 같이 가실래요?”하고 묻는다. 자기 외할머니가 전화를 하시면 제 아빠보고, “민 서방 전화 받아요.” 하고, 자기 이모가 전화하면 “형부, 전화 받아요.” 한다. 우리 부부가 전화를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라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서, “에미나 애비 바꿀까요?”묻는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적절한 호칭이 있는데 우리는 그냥 적당히 넘기기 일쑤다. 내 남편의 제자들이 대여섯 쌍 모인 곳에 우리 부부도 참석한 적이 있다. 모두 다 목사 부부였다. 그들 중 몇이 자기 남편을 부를 때 “목사님!”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아내로서 남편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교인 중 한 사람으로 치고 남편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요즘 목사 부인들이 자기 남편을 그렇게들 부르는 것이 예사인가 보다. 나는 그 여성들을 나무랐다. “목사님”이라는 호칭은 교인들이 목사를 부르는 칭호라는 것, 누구나 당신 남편을 “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목사와 결혼한 사이인 아내들이 그냥 교인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은 아내들만이 목사인 남편들에게 쓸 수 있는 그런 특권이 있는 호칭이 아니냐고, 그 좋은 호칭을 왜 안 쓰느냐고 타이른 적이 있다.

목사들이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 사모 師母”라고 하는 것도 듣기에 거북하다. “사모”는 제자가 스승의 아내를 부르는 존칭인데, 자기와 동격인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들 앞에 존칭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나는 위로 오빠 둘,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다. 올케가 넷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아가씨” 라는 말은 거의 못 듣고 자랐고 “고모”라는 말만 들었다. 막내 올케만 나를 “형님”이라는 칭호로 부른다.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그 올케가 난 너무 좋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말이 중요하다. 특히 호칭도 아주 중요하다.

내 아래 동서가 있는데 우리 부부를 그냥 “큰아빠, 큰엄마”라고 부른다. 시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고 해서 하루는 내가 호칭을 바꾸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 후 예쁜 동서는 “형님, 아주버님”으로 불러준다. 기분이 좋고 정이 더 간다.

내가 양광교회 다닐 때 일이다. 그 당시 양광교회에서 세 명의 소속목사가 있었다. 교인들은 그 부인들을 그들의 성을 따서 “정 사모님”, “김 사모님”이라고 불렀는데 내 성도 김이어서 “김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같은 이름이 둘이어서 헷갈린다고 해서 내 남편의 성을 붙여 “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많이 이상했지만 달리 해결책을 못 찾아 양광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늘 그 칭호로 불리고 있다.

내가 신학교 출신이고 교회활동도 많이 하고 해서 그곳에서 권사의 직분을 받았다. 그 후 용두동교회로 옮겨서 지금은 용두동교회 교인이 되어 벌써 7,8년이 지났다. 나는 헌금봉투 직분 란에 권사라는 단어를 줄기차게 적었지만 아무도 나를 권사로 불러주지 않는다. 그냥 교회에서는 “사모님”이 “권사님”보다 훨씬 좋다는 말로 위로(?)해 준다. 나에게 알맞은 호칭을 찾아야 되나 그냥 두어야 되나 아직 고민이다.

나를 정확히 알고 나의 정체성을 살리는 나만의 특권을 누리고 싶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정체성도 인정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