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2/2009

 

 

 

 

 

 

 

 

 

 

 

 

에니어그램영성 (95)

 

# 3번 유형 : 야곱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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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지에프와 에니어그램의 지혜

에니어그램 격언






 


1.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야곱 세계적인 비평가 노스롭 프라이는 성서를 ‘Great Code'라 이름을 붙여 책을 쓴 일이 있다. 그 뜻은 ’위대한 경전‘도 되고, ‘위대한 암호’도 된다. 이를테면 재미있는 말장난을 한 셈이다. 어쨌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서에는 풍부한 상징이 있다. 은유와 이미지와 비유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런 상징적 언어가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직설적 표현보다 더 리얼리티를 잘 드러낸다.

예를 들자면,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쌍둥이 형인 에서와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고 기록(창 25:22)되어 있는 것이나, 야곱이 나면서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는 것 등이 앞으로 그 둘의 관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게 하는 면이 강하다.

또 한편으로 생각할 것이 성서는 위대한 구속사 드라마라는 점이다. 구원의 역사가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흐를 때,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이 대서사시로 이어지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이란 사람들의 치부 또한 가차없이 드러내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서는 위대한 역설이기도 하지만, 믿음의 조상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통하여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만드는 힘도 대단히 강하다.

아마 에니어그램의 기초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야곱의 이름을 떠올리면, 얼른 에니어그램 3번 유형을 떠올릴 것이다. 3번 유형은 외모에서부터 성격의 특징까지 가장 눈에 잘 띄는 성향이 있다. 항상 ‘날 좀 보소’ 하는 신호를 무의식적이라 할 만큼 자동적으로 내보낸다. 이는 자기가 세운 목표나 뜻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해서 그럴 뿐 아니라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확장 의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능률과 성공이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거나 함정이 되기도 한다. 목표 지향적이기 때문에 한번 마음먹으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성취해야 된다. 흔히 말하듯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를 앞세운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나갈 때 소위 ‘드라이브’가 강하다고 한다.

3번이 이토록 목표를 향하여 그야말로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는 스타일이 될 때, 주변 사람의 이목이나 더욱이 관계 당사자의 사정 같은 것은 별로 고려의 대상이나 관심거리가 안되기 쉽다.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나 스케줄도 자기중심적으로 짜여 지기 십상이다.

이런 심정이 될 때, 성공은 해야겠고 실패는 피해야겠다고 강력히 자기 암시를 하다보면, 3번 유형의 격정인 기만에 사로잡힌다. 자기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 남을 속이면서도 스스로는 정당화시키며 알리바이를 찾는다. 이는 남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자기를 달래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격정이 작용하는 것이다.

야곱의 이름이 지닌 뜻 자체가 형의 ‘발뒤꿈치를 잡다’라는 것이며, 동시에 ‘속이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 창세기 기자는 야곱이 에니어그램 3번 유형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니어그램의 체계에 비추어 보자면, 성격 유형은 만 여섯 살에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어떤 특징을 묘사하기 위하여 드라마틱하게 상징성을 동원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한다. 어쨌든 야곱의 일대기는 창세기 절반에 걸쳐서 펼쳐지니까 3번 유형의 변화와 성숙을 추적해 볼 일이다.

2. 꿈꾸는 야곱

꿈꾸는 사람을 말하면 사람들은 요셉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야곱도 실은 기묘한 꿈을 꾸었다. 일생일대의 꿈이다. 성서는 숨김없이 야곱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그러면서도 그가 꾼 희한한 꿈을 특별히 다룬다.

실은 모두가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서도, 유독 야곱만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다. 믿음의 조상들 모두 예외가 아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성서가 거룩한 경전이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숨김없이 싣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만큼 솔직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생과 인성에 대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음을 뜻한다.

누구나 다 목표 달성에 집착하거나 특히 결과에 집착하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그렇게 되면, 설령 속임수를 쓰게 되더라도 스스로 합리화시키면서 양심의 가책도 안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 못 느끼거나 굳이 안 느끼려고 애써 외면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고, 목표 달성에만 집중하면 남의 눈에는 보이는 진실이 자기 눈에만 안 보이게 된다. 누구나 이런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에니어그램으로 보면, 3번 유형이 두드러지게 이런 면이 강하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탐내며 눈독을 들인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드디어 절호의 찬스가 찾아온 것이다. 눈에 불을 밝히고 찾는 사람이 아니면 기회가 와도 못 보기가 쉬운 법이다. 그러나 야곱처럼 목표 달성과 성공에 대하여 남달리 집념이 강한 3번 유형은 기회를 만들지언정,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칠 일이 없다.

그렇게 얻은 기회를 잡아 멍청한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을 주고 그 어마어마한 장자의 상속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일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야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채는 일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러자니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다.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야곱이 한 짓이다.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한 야곱이 그 다음 단계에는 에서가 두려워졌다. 그래서 에서의 죽일 음모를 피하여 야곱이 달아난다. 형의 분노가 풀릴 시간도 벌 겸, 부모의 권유를 따라 아내감을 얻으러 밧단아람으로 길을 떠난 야곱이 하란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창 28:11-12)

꿈속에 그가 보니 하늘에까지 닿은 사다리가 보였다.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하나님께서 그 사다리가 닿은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창 28:13-14)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생각이나 이해심을 넘어선다. 야곱에게는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꿈이 계시의 경로가 됨을 동시에 확인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꿈을 통하여 받았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이 어떻게 하였는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곳을 베델이라 이름하고 하나님께 섬김과 십일조를 서원하였다. 이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야곱의 인성 즉 성격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숙하는가를 지켜보는 눈에 비친 모습은 우리에게 두 번 생각하게 만든다.







구르지에프와 에니어그램의 지혜 3


구르지예프는 일찍이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에너지가 결합되어 힘을 발휘해야 한다.’ 에니어그램의 지혜는 바로 이런 뜻을 함유하고 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였다. ‘에니어그램은 우주의 상징이다. 모든 지식은 에니어그램에 포함 될 수 있으며, 에니어그램의 도움으로 모두 해석될 수 있다.’ 또 ‘에니어그램은 영속적 운동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에니어그램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구르지예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그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제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 같다. 에니어그램을 예로 들자면, 그 속에 담긴 깊은 지혜와 영성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성격 심리학적 접근에 머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또한 영속적 운동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역동성도 외면하고, 그저 정태적 이해에 그친다. 그러므로 성격의 에니어그램을 말하면서도 연속태조차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나타나는 에니어그램에 대한 오해나 왜곡은 사실상 구르지예프에 대한 오해 내지 제한적 이해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오늘날 성격 심리학의 관점에 볼 때 구르지예프가 성격의 에니어그램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오스카 이차조 Oscar Ichazo가 수피들에게서 배워서 전수하였으며 클라우디오 나란호 Claudia Naranjo가 세련되게 체계화하여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즉, 구르지예프가 다룬 방대하고도 심오한 우주론과 인간론은 제외하고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에니어그램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무어 James Moore, 제임스 니들먼 James Needleman, 케네스 워커 Keneth Walker 등이 최근에 Gurdjieff International Review에 실은 구르지예프 평전만 봐도 구르지예프가 얼마나 심오하고 예리하게 인간의 격정을 꿰뚫어 보고 가르쳤는가를 알 수 있다. 단행본으로 이 문제를 다룬 ‘파리의 바보들 Idiots in Paris’이 입증한다. 여기서 구르지예프는 개인의 성격 유형과 그의 상태에 대하여 예리하게 가르친다.

구르지예프가 현대사회에 에니어그램을 전수한 목적과 근본 뜻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굼리 Gumri라고 불리우는 러시아와 알메니아 접경지대에서 1866년에 태어난 구르지예프는 이집트를 포함한 중근동지방과 티벹을 포함한 아시아와 극동지방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진리를 찾아 여행을 오랫동안 하였다. 1912년경 러시아에서 ‘내가 이미 배운 것을 사람들의 삶 속에 넣어주겠다’고 말하면서 가르치기 시작한 구르지예프는 잊어버린 지식과 모호해지거나 무시되어온 지식 즉 비밀 전수된 지식 Esoteric Knowledge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힌다 (Life, P.28).

그가 제1성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첫째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asleep’, 둘째 중심적인 ‘나’는 없고 ‘수많은 나’ Many I's로 존재한다. 셋째 기계적으로 기능하면서 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묻는다. ‘대체로 말해서 생명의 의미와 의의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인생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What is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life in general and the aim and purpose of human life in particular?' 이에 대한 답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류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라. Work and live for humankind!

이 뜻을 가장 명쾌하게 드러낸 아인슈타인 Albert Emstein 에게서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로서,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된 일부이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나머지 전체와 분리된 것처럼 경험하는데, 이는 일종의 인간 의식의 시각적 망상, 곧 착각이다. 이 망상은 우리에게는 일종의 감옥이 되어 우리를 개인적 욕망과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 대한 애정에 갇혀 있도록 한정시킨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뜨거운 동정심의 원을 넓혀서 생명 있는 모든 것과 자연계 전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살아감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구르지예프가 1916년에 티플리스 Tiflis에서, 그리고 후일에 1922년에 파리 근교 프리외레 Prieure에서 인간의 조화로운 발달연구원 Institute of Harmonious Human Development을 세운 목적도 이 뜻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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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니어그램협회 가을학술대회 기조강연,
2008년 10월 24일, 김영운 박사.






에니어그램 격언



수련 인성을 위하여 : 늘 깨어 있으라

기계적 삶에 저항하며 살기 위하여
수련하는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정진, 또 정진!



명상 36

몸은
보이는 정신이고,
정신은
안 보이는 몸이다.

Body
Is the tangible mind,
Mind
Is the invisible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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