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말에는 소리말과 글자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리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글자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소리말, 즉 음성언어는 대화를 통해 직접 전달되지만, 글자말, 곧 문자언어는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지요······ .”
나는 말과 글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교양국어시간이었다.
“······음성언어는 손짓, 억양, 몸짓, 표정 등 부수적인 표현방법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자언어는 이러한 표현방법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음성언어, 즉 말은 듣는 이의 반응을 그때그때 살펴 전달하려는 내용을 강조하거나 반복해서 말할 수 있지만, 문자언어 즉 글은 독자의 반응을 즉시 참고 할 수 없지요······.”
학생들은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분필끼우개에 끼운 분필을 들고 칠판에 알아보기 쉽게 도표를 그렸다.
“말은 이렇게 비교적 쉬운 내용을 간단하게 전달하지만 글은 보다 복잡한 내용도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요. 그러나 말이 쏟아놓은 물을 되담을 수 없듯이 수정이 불가능한데 비하여 글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한 잇점이 있습니다······."
나는 분필끼우개에서 분필을 빼냈다. 손가락에 분필가루가 약간 묻었지만 양복 겨드랑이 밑에 쓱싹 닦아버렸다. (아내가 보았으면 분명 나무랄 일이었다.) 그리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강의실은 더욱 산만해졌다.
행정과, 도예과, 영어과, 일어과, 비서학과, 금속공학과 등 8개학과 수강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시후 강의실은 텅 비었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다 왔어요. 종착역입니다!”
그때 누군가 날 흔들었다. 눈을 떴다. 주위가 썰렁했다. 전동차 안, 푸른 옷을 입은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이미 저만치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방이 안보인다. 분명히, 강의 노트만 꺼내고 안경집까지 담아 선반에 얹었던 가죽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선채로 강의 노트를 들여다보다가 뒷자리가 하나 비길래 뒷걸음쳐 앉았는데, 잠든 사이 누군가 갖고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나는 한 때 유명한 화장품 회사의 홍보실차장이었다. 사보 "연지곤지"의 편집주간이기도 했다. 그때만해도 나는 시인이었다. 시집도 내고, 내 시집이 시내 큰 책방 책꽂이에 꽂혀있었다. 그래서 가끔 서점에 들르면, 처음보는 책을 뽑아보듯 내 시집을 뽑아 후르륵 책장을 한번 넘겨보고는 다시 꽂아놓고 돌아서며 흐믓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주 바쁘다. 경제라는게 아주 나빠지자 화장품회사는 우선 사보를 휴간하고 나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를 잃으면 더욱 바빠진다. 참 이상하다.) 대학과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맡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보따리장사라는 거다. 보따리장사에겐 5대불문이라는 게 있다. 우선 시간 불문이다. 한시간짜리이건 세시간 연강이건 묻지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학교에서 수강인원이 많아 두반으로 나뉘인 경우, 첫째시간이 오전 9시 30분 시작이고 둘째 시간이 오후 3시 30분 시작이면 그 사이 시간이 빈다. 그래도 묻지 않고 오케이다. 그런데 보따리 장사에겐 연구실이 따로 없다. 오전 10시 45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어디서 무얼한단 말인가. 그 사이 점심도 먹어야하는데 아는 이 없어 혼자먹는 교수식당도 어색하고 학생식당은 더더욱 쑥스럽다.
두 번째가 다소불문인데 학교마다 들쑥날쑥, 강의료가 많든 적든 불문에 부친다는 얘기이다.
세 번째는 남녀불문, 네 번째가 주야불문, 그리고 다섯 번째가 원근불문인데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인이 시만 써서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는 좋은 나라다.
사람들은 나더러 시인이라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요즘 시를 통 못쓴다. 하기야 전에 쓴 것도 내가 보기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그나마 못쓴다. 한때 소설을 쓰다가 요즘 나같이 보따리장사가 된 친구를 전작가라고 부르니 나는 전시인쯤 되는 셈이다.
시인이 시도 못쓰면서 바쁘기만 한 건 참으로 싫은 일이다. 싫은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건 슬픈일이다.
나는 손가락에 분필가루 묻히는 걸 싫어한다. 분필을 들었다하면 재치기가 나온다. 그러나 강의내용도 가지가지, 교양국어, 문장론, 시창작실습 등 이 또한 정해주는 대로 받다보니 분필사용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분필을 쓰고나면 손을 닦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손씻는 걸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분필가루를 옷에 묻히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면 아내가 싫어했다. 나는 무엇보다 아내가 싫어하는 걸 싫어했다. 아내가 상을 찌푸리면 나도 따라 찌푸리게 된다. 둘이 같이 상을 찌푸리다보면 곧잘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학기초 학생들에게 부탁한다.
“나는 분필가루를 싫어한다. 물 묻힌 휴지를 좀 준비해 두렴.”
그러나 학생들은 곧잘 잊어버린다. 남학생들은 특히 그렇다. 물론 잊지않고 갖다놓는 학생도 있다. 물론 여학교라고 다 그런것도 아니다.
나는 분필을 쓰고나서 물묻힌 휴지로 손가락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웃으면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은박지 접시에 담아 놓으니 더욱 좋아요. 다음 시간에도 부탁해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