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여성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임기가 끝나 퇴직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40년 가까이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기도하며 몸 바쳐온 사람들이라 휴식이나 즐거움을 목적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이 그리 익숙치 않아,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2박 3일을 정해놓고 ‘딱히 어디로 간다는 목적을 앞세우지 말고 그냥 떠나서 마음 가고 몸 가는데서 쉬자’는 계획을 세웠다.

동해안을 갈까? 남해로 갈까? 아니, 바다를 끼고 마냥 달려볼까? 그러나 숲 속에 가만히 앉아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심리적으로 폐쇄성이 싫었다고나 할까? 기독교 기관이며 여성기관이라면 다른 회사들과는 틀린 환경적 특성이 있다.

우선 봉급이 적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프로그램도 많다. 동료들과 부딪치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이런 것들을 다 소화하면서 살려고 하다보면 매끄럽게 잘 넘어가기 보다는 갈등이 생기는 것은 물론 좌절감을 곧 잘 느끼기도 한다. 여러 가지 억제를 하며 일 해 왔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위로 받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일단 땅 끝 마을로 가보기로 했다. 한 겨울인데도 해남에는 황토 흙, 적토 흙의 밭에 보리나 배추가 파랗게 수 놓여져 있었다. 보리라고 하면 삐죽삐죽한 바늘 같은 느낌만 있던 나에게 처음 본 보리 싹 은 나에게 새로움을 더하여 주었다.

농민들이 배추를 뽑고 있는 배추밭을 지나다가 우리는 맛있는 배추를 사고 싶어서 밭으로 갔다. “이 어쩐 일인가?” “마음대로 거저 가지고 가라“고 한다. 자동차 뒤에다 9개만 실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줄 생각을 하면서....

우리에게 배추는 돈을 주고 사먹는 식품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거저 얻고 보니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제일 길다는 ‘도륜산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 내려서는 산꼭대기로 올라 갈 수 있게 나무 계단을 해 놓았다.

어제 밤에 내린 눈으로 나무 위에는 눈꽃이 피어있다. 바람을 뒤로하고 올라가니 별로 힘이 들지는 않았다. 내려올 때 또 눈이 펄펄 내렸다. 상쾌한 공기는 물론, 기온은 별로 춥지 않으면서 쌩쌩부는 바람은 정말 50년 만에 만나 보는 것 같다. 평소에 잘 걷지 못하던 내가 제일 먼저 걷자고 하였다. 자꾸자꾸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자연은 바로 이런 것인데 어쩌다가 내기 이런 자연과 멀어져 살고 있는가?” 하는 속상함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 친구는 퇴직을 하기 전에는 늘 옆에 있는 자연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일에 쌓여 살다가 그래도 퇴직을 하고 보니 자연에게로 눈을 돌릴 수 있으니 감사하다며, 감사를 연발하고 다녔다. 어떤 보석을 선물을 받는 것 보다 더 좋은 자연을 선물로 받고 있으니 말이다.

땅 끝에 펼쳐진 바다!

우리는 땅 끝이라 부르지만 그 곳에서는 맨 처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땅 끝 마을에서 서울이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까지 2천리, 그래서 우리나라를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한단다.

동네바다에서 잡은 병어, 자연산 굴, 더 맛있는 김, 나물을 , 처음 먹어 보는 매생이국을 먹으면서도 감사라는 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딸기에는 왠 물이 그리도 많은지! 겨울에 멸치젓에다 배추쌈을 먹는 재미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여행 중에 내내 느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동안 놓치고 산 부분이다. 큰 일, 좋은 일에 감사하는 버릇이 있는 우리들은 겨울 땅에서 비집고 나온 작은 풀 한 포기, 뺨에 스치는 바람 한 줄기, 은 빛 바다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일! 등 이 또한 모든 것들이 감사의 조건인 것이다. 일에 쫓길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퇴직을 한 후에야 보이고,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의 안타까움을 새삼 느끼는 것까지도 감사한 일이다.

인생의 수명이 길어져 아직도 살 길이 많이 남아있는 젊은 퇴직자들이, 작은 일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연구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