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싹이 벌써 이렇게 컸네.”
빌라 곁을 돌아 나오는데 엄마가 말했다.
“응? 뭐가?”
뭣이 있었나 싶어 뒤돌아보았다. 벽체를 따라 오래된 군청색 화분 여남은 개가 놓여 있다.
“저기 뾰족뾰족한 거. 그새 싹이 셜셜셜셜 자랐네. 처음 왔을 땐 요만 했는데.”
엄만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크기를 가늠해 보이신다.
“무슨 꽃이야?”
“수선화인 거 같아. 원추리일 수도 있고.”
지난 며칠 사이 엄마와 같이 이 길을 다녔지만, 나는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꽃을 좋아하는 엄마 눈엔 걔네들의 변화가 읽혔나보다.
부모님은 5년 전에 전남 장흥으로 귀촌하셨다. 공사하고 난 뒤 바로 가보았을 땐 집 주변에 붉은 흙과 자재들이 널려 있었을 뿐, 어지럽고 황량했다. 지금은 꽃동산이 됐다. 하얀 매화가 꽃망울을 틔웠으니, 엄마가 가꾼 앞마당엔 이제 수선화, 개나리, 진달래, 작약, 영산홍, 송엽국, 매발톱도 필 게다. 또 엄마랑 다니다보면 밭에서 냉이, 개불알풀, 광대나물, 양지꽃, 뱀딸기 같은 풀꽃들을, 가까운 산기슭에서 은방울꽃, 춘란, 애기나리, 꿀풀, 옥잠화를 찾아볼 수 있을 거다. 철 따라 복숭아, 살구, 배, 사과, 감 같은 과실나무 꽃도 피어날 테고.
엄마는 3년 전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신 뒤로 가끔씩 카톡으로 꽃 사진을 찍어 여러 장 보내주셨다. 그런데 당시엔 엄마가 그렇게 꽃을 좋아한다는 걸 잘 몰랐다. 그저 ‘이런 꽃도 피었네.’ 신기해하거나, 힘들어서 좀 우울할 때 타이밍 딱 맞게 날아온 엄마의 꽃 사진이 위안이 되었을 따름이다. 엄마가 꽃을 참 예뻐하고 자연에 관심이 많고 식물을 잘 돌보신다는 걸 알게 된 건 작년 봄부터다. 엄마가 수술하시고 자주 장흥 집에 내려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부터.
어릴 적에 난 엄마를 무지 좋아했었다. 엄마의 좋은 점들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여러 가지가 생각났다. 엄마가 우리 엄마인 게 자랑스러웠다.
‘우리 엄만 착해. 엄만 약속을 잘 지켜. 엄만 거짓말을 안 해. 엄만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엄만 자기가 옳다고 믿는 걸 실제로 지키려고 해. 엄만 뭐 가르쳐줄 때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알려줘. 엄만 내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지 않아. 어떤 엄마들은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가짜로 꾸며낸다는데, 우리 엄만 안 그래. 자기가 잘 한 것도 잘 못 한 것도, 좋아한 것도 싫어한 것도 있는 그대로 말해. 엄마 말이나 엄마를 아는 주변 사람들 말에 어긋남이 없지. 엄만 어릴 때부터 긍정적이고 많이 웃었대. 엄만 내가 접시나 책장 유리를 깨뜨릴 때 혼내지 않고 내가 괜찮냐고 물어봐.’
하지만 속 깊이 불만도 있었다. 엄마가 동생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동생을 시기하고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춘기 들어선 엄마가 내 맘을 몰라준다며, 엄마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라며 실망하고 속상해했다. 이런 감정들은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다. ‘이렇게 좋은 엄마한테 이런 마음을 품는 난 정말 나쁜 사람이야.’라며. 에니어그램을 만나고서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를 미워했다는 것을, 또 엄마의 올곧고 소박한 삶을 존중하지만 내겐 엄마와 다른 욕구와 가치관들이 있고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는 것을. 엄마는 귀촌을 결심하고 장흥으로 내려가셨고, 난 광명에 남아 볍씨학교 교사로 살았다. 그 뒤론 엄마와 아주 가끔 만날 수밖에 없었고 엄마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
2014년 안식년을 맞았다. 이상하게 엄마는 만날 때마다 체했다며 굶으셨다. 구토도 하시고 많이 아파하셨다. 위하수와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이라며 한의원에 다니신다는데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2015년 2월 23일, 종합병원 의사에게 엄마 몸 속 대장암이 심각하고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3월, 수술을 마치고 하루는 엄마와 걷기 운동하러 복도로 나왔다. 간호사실 앞에 프리지아가 있었다.
“엄마, 이 꽃, 향기가 되게 좋더라. 작년에 요양보호사 교육 받을 때 프리지아를 좋아한다며 교실에 이걸 갖다 놓은 분이 있으셨거든. 그래서 알게 됐어.”
“음~ 좋지. 나도 프리지아 좋아해.”
‘으응? 엄마도?’
난 엄마가 누우신 병원 침대 창가에, 우리 집 이부자리 옆에, 노오란 프리지아를 늘 꽂아두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