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서 자료를 찾다, 우연히 몇 년 전 연말에 한 지인이 내게 보낸 손편지를 발견했다. 나를 만난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예쁜 편지지에 정갈하게 쓴 그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부끄러워졌다. 과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그에게 그런 사람일까….

몇 년 전 우리 두 사람을 함께 알고 있던 사람이 참 좋은 분인데, 나랑 잘 맞을 것 같다며 그이를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는 공부를 아주 잘했고, 순수하지만 유머러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그저 좋은 뜻으로만 받아들이고 앞뒤를 잘 못 재는 나와 달리 그는 냉철하게 분석하여 내가 실수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마음이 슬프거나 힘들 때, 늘 따뜻하게 받아주었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신앙이 깊어 내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나를 통해 하나님이 사랑을 확신하였다는 고백을 해오다니, 새삼 감격스럽다. 사람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내게 아들은 ‘엄마는 좋겠어요. 세상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다니…’하고 세상이 만만치 않으니 그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다가는 순수한 마음을 다쳐 상처받는다고 충고를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대단한 능력자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저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뿐 이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많이 얻었다. 무엇보다 나를 참견해주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결혼이후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 했던 나는 다니는 곳마다에서 뭔가를 배웠다. 운전, 외국어, 바느질, 수영, 꽃꽂이, 요리, 와인……. 자격증도 따고, 전시회도 가졌지만 어쩐지 허기진 사람모양 늘 양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끈기도 부족해서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니 조금씩 아는 체는 할 수 있었지만 딱히 전공이라 할 수도 전문가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자원봉사에 대해 알게 되고 상담자원봉사에 눈을 뜨면서 나는 달라졌다. 거의 20년을 상담심리공부와 상담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제는 상담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늘 공부를 해야 하는 분야이지만, 나는 이 분야에서 특별한 보람과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되어 2016년부터 시작한 피해자 상담에서 많은 범죄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다. 범죄피해를 당한 것이 마치 부주의한 자신의 탓인양 자책감에 시달리는 청년,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님의 이혼으로 자신감이 떨어져 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감추며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던 청년, 짱과 친하면 작고 허약한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하여 중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다가 몇 년 동안 폭행을 당하고 금품을 빼앗기며 지옥같은 생활을 하던 청년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을 다시 본다.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 안에 들어있는 진한 삶의 그림자들이 어린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모두에게 어려있다. 상담자로서 한 사람의 인생 속에 들어있는 삶의 역사를 듣다보면 그 사람이 오늘날까지 견디어 온 것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리고 같은 세월을 살고 있는 우리 각각이 어쩌면 그리 다른 세월을 살게 되었는지 안타깝기도 하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참 변화와 치유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마음으로 기도한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내 앞에 온 이 사람은 부서졌던 마음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갖고 와 앉아서 내게 도움을 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를 시작한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던 한 해, 중단해야 할 일과 계속해야 할 일 가운데서 자주 고민했던 한 해가 갔고 새 해가 시작된다. 그리고 내게 올, 우리에게 올 365일의 새 역사를 쓴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함께 멀리 가보고 싶다.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든, 동료이든, 업무대상자이든, 그냥 옆집 사람이든. 그리고 당신이 있어 더 좋은 한 해가 되었다는 고백을 또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