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막9:24)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찾은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듣자 외친 말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니 나에게 믿음을 채워달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기도를 해야 할까요? 우리 생애에 이 기도를 멈출 날이 올까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한지 충만한지 그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무엇일까? 내가 기도하는대로 응답이 100% 이루어지면, 믿음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지구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100% 응답하신다면, 지구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요. 그러니 ‘응답 받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라는 상투적인 선전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좀먹는 암세포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로는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먼저 이것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향한) 믿음인가? 사람들이 원하는 각자의 욕망과 이익을 위한 믿음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길일 것입니다. 신앙이란 오히려 그런 욕망을 내려놓기 위함인데, 오늘의 현실은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거짓 믿음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삶은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생로병사의 삶을 기꺼운 마음으로 끌어안고 그것을 맞이하는 순간순간을 영적 성숙의 발판으로 삼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 아닐까요?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내려놓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이 순간 깨어 ‘현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입니다. 많은 이들이 현존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이들이 ‘어제도 없다, 내일도 없다, 오늘을 산다!’며 오늘 현존한다고 말하지만 욕망에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을 산다고 현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나 혹은 미래를 생각한다고 현존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착각은 시간의 방향성 때문입니다.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은 흐른다는 카이로스의 시간관 때문에 현존에 대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진정한 현존이란 이 시간의 방향성에서 벗어나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 안에서 깨어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붙들려 잠든 채 관성적으로, 그래서 과거의 상처에 붙들려 늘 우울하고 불행해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상처에 현존하며 깨어 관찰하고 의식하며 기꺼이 끌어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벽을 쌓고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리며 사는,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하늘나라를 꿈꾸며 이 세상을 외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 하늘나라를 사는 것처럼 하늘 백성의 삶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욕망에 잠든 채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내려놓고 오늘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삶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즐거워하며 현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출발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올해의 말씀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들은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25절)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아버지가 깨어있었다면 아들과의 관계, 즉 소통의 채널을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아들에게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았겠지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어릴 때부터”라는 아버지의 대답은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대두되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점, 부모와의 소통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현재 아들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에 깊이 잠들어 본래 이 아이가 어떤 아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을 만큼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있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은 바로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아버지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깨어있었다면 다른 믿음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아들을 구원한 사건이 아니라, 아들-아버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를 구원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깨어있을 때 가능합니다. 구르지에프는 깨어있음이 인간의 실존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키는 가장 강력한 충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완전히 개발되어 존재하는 더 높은 차원의 감성과 지성이 있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잠들어 있는 우리가 그 목소리를 못 듣는 것이지요. 올 한 해가 잠에서 깨어나 나를 부르는 ‘참 나’의 목소리를 듣는, 진정한 삶을 회복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