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스산합니다. 어제까지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오늘은 노랗게 물들어있습니다. 또 한 밤을 자고 나면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잎새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겠지요. 옥빛 하늘에 마음을 씻고 나면, 마지막 잎새마저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은 숙성의 계절입니다. 인생의 맛이 익으려면 아직도 찬바람을 더 견뎌야 합니다. 꺾이지 않을 기세, 으르렁거리는 눈빛,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로운 말씨, 모래알처럼 서걱한 가슴, 건성으로 흘려버리는 신음소리, 세월을 부리기라도 할 듯 재촉하는 발걸음 등 모두가 조물주 앞에서 호기를 부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은 순치 馴致의 계절입니다. 아직도 ‘나’는 굳어버린 관절처럼 뻣뻣합니다. 좀 더 다듬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깨지고 뭉개져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가을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씨 뿌린 농부는 곡식이 자라기를 기다립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 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약 5:7-8). 기다림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지면 좋으련만, 오랜 기다림 끝에도 우리들의 소원은 어긋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림보다는 서둘러 길을 달려가나 봅니다. 지금 이 시간도 남보다 앞서가려는 사람들로 세상은 어수선합니다.

바야흐로 동면의 계절이 잰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옷깃을 여미는 것은 단지 쌀쌀한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예비하신 한 성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쌓아둔 것, 썩어질 것, 부서질 것, 먼지로 사라질 것들에게 집착하지 말고 해 기우는 지평선 너머 새로운 땅을 보라고 하십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자유가 있고, 누더기 같은 욕망의 옷을 벗어던질 때 영혼의 눈이 뜨입니다. 참된 용기는 애처로운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살다가 내일은 흙에 묻힐 부질없는 인생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인간이 자기 땅에서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면 착각입니다. 조물주께서 낙엽이 지고, 철새들이 꾸역꾸역 날아오르고, 사랑하는 이가 영구차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도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는 무언의 말씀일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믿었다. 고로 말했다”(고후 4:13)고 합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온통 보이는 것들과, 지나가는 것들과, 퇴색할 것들에 매달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상실하고 있는 이 세대는, 제 몸을 털어버리는 낙엽만도 못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참다운 가치는 강함에 있는 게 아니라 약함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또 말하기를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후 4:7)라고 했나봅니다.

가장 좋은 선물은 더디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다림 없이 손쉽게 얻은 것들은 사람을 온통 뒤틀어놓습니다. 인내 없이 얻은 것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가을의 맛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가을은 제 몸을 불태워 새하얀 연기로 제사 드리는 낙엽처럼 희망의 불씨를 가슴에 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쉬어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결 편안해질 터인데. 가을은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시시비비로 찢기고 갈린 마음에 기도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