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인가를 섬기며 혹은 매여 삽니다. 물론 그 ‘무엇’은 다양합니다. 옛날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오늘날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그 ‘무엇들’을 수시로 바꾸기 때문에 마치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엇’ 혹은 ‘무엇들’에게 매여 사는 게 현실입니다. 권력에 매이든지, 돈에 매이든지, 유행에 매이든지, 정념에 매이든지, 두려움에 매이든지 ….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종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전향한 이들입니다(롬 6:15-23). 물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완성된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성화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이전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예배 의식도, 선교활동도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인간 자신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 아래 있습니다. 연약한 심리기저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최근에 유전자 연구는 이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DNA는 자신을 복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도 윤리도 미련도 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리처드 도킨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유전자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유전자가 인간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과 세계 현실에서, 세상과 복음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하나님의 선교신학’이고, 세상은 변해도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세상(인간)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인간에게로 향합니다. 양자는 나름으로 타당성을 지님과 동시에 결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세상에 대한 관심은 높은데 인간의 피조성 곧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달리 말하면 치열한 자기 성찰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자기 성찰’이 무엇일까? 어느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에 혼자서 아이를 낳습니다. 산모는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 봅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그게 두려워서입니다. 산모는 평소 자기가 불구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성찰이란 그렇게 통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신영복, [담론]).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세상의 변화에는 민감하면서도 자기 또한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통절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의는 강합니다. 우리는 최근 일단의 정치인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답답함을 목격합니다.

반대로 ‘복음주의 신학’은 변치 않는 복음은 강조하면서도 급속히 변하는 세계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쉽니다. 고통 받는 인간과 파괴되는 피조세계에 대한 관심이 피상적입니다. 게다가 편협한 신앙과 윤리로 자기와 타자를 기계적으로 구분합니다. 가톨릭을 이단으로 단정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극단적입니다. 그들에게 성소수자들은 세상이 품어서는 안 되는 불결함이요 죄악 덩어리입니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가 전해주는 삭개오 이야기(눅 19:1-10)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을 동시에 조명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 한다는 비난을 개의치 않고 삭개오의 초대에 응하신 것이 하나님의 선교신학을 반영한다면, 삭개오가 회개했을 때 구원을 선포하신 것은 복음주의 신학을 반영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입장이셨을까? 어느 입장도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삭개오를 대하신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변화된 조건 즉 회개했기 때문에 베푸시는 게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에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절실한 것은, 역겨운 자기 의로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걸 멈추고, 어느 불구자 산모와 같이 치열한 자기 성찰 앞에 서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