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아일랜드의 경찰관 로버트 버크와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윌스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최초의 유럽인 탐험대를 이끈 리더입니다. 버크와 윌스는 낙타 여섯 마리에 3개월 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싣고 출발했지만, 메닌데 북쪽 사막에서 그만 식량이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막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만나 연거푸 세 번이나 구원을 받게 됩니다. 원주민들이 친절하게도 탐험가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버크가 어리석게도 원주민에게 권총을 쏘자 겁에 질린 원주민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이 떠나고 한 달이 지나기 전에 탐험대원들은 모두 굶어 죽고 맙니다(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보복 : 에브라임 산지의 한 레위인은 음행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간 첩을 데리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에 날이 저물어 베냐민 족이 살고 있는 마을의 한 노인 집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그날 밤 마을의 불량배들이 몰려와 레위인의 첩을 끌어내 밤새 욕보이고 새벽에 놓아주었는데, 그녀는 노인의 집 문턱에 엎드러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분한 마음에 첩의 시신을 열두 토막을 내서 이스라엘 12부족에게 보냅니다. 흉악한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부족은 “이런 일은 오늘날까지 행한 일도 본 일도 없다”(삿 19:30)며 보복을 다짐하고, 베냐민 부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습니다. 광야로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장정은 600명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이스라엘 연합군은 살아남은 베냐민 족속의 남자들에게 누구도 딸을 주어 자손을 두지 못하게 결의까지 합니다. 이스라엘 12부족 가운데 베냐민 지파 하나가 멸절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이스라엘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자신들의 서약을 스스로 어기면서까지 베냐민 지파가 대를 이을 방책을 구하기는 했지만, 보복의 악순환은 지금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대화 : 수가성 우물가의 이야기.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던 예수께서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물 한잔 달라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요 4:5-26). 그러나 실제 이야기의 배경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가 되어서 상종 자체를 금기시 했습니다.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은 순탄한 삶을 산 여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유대인 남자가 먼저 다가가서 물 한잔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여간 부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목마름이라는 자연적인 필요를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여행길에서 육신이 목마른 유대인 남자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영혼이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이 서로 엇갈리면서 아슬아슬하게 대화의 끈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역사적으로 얽힌 문제, 종교적으로 얽힌 문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등 본질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됩니다. 그리고 종당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문제들이 해체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남과 북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전면에 내놓고 서로를 굴복시키겠다며 겁박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내뱉는 마초들의 언사로 인해 피차 감정은 더 사나워지고, 국제적으로는 더 복잡해지고, 마치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가 최후의 순간을 향해 마주보고 달리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오늘의 남과 북의 문제보다 더 풀기 어려운 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얽힌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물 한잔 달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그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갔습니다. 적에 대한 인식이 강고한 나머지, 지금 우리에게 그런 지혜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게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 땅에서 벌이는 생존 문제임에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인 것도 슬픈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줄곧 미국의 안보 우산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번영을 이룬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라의 안보를 정권유지와 기득권 보호의 수단으로 삼고,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한 결과를 지금 돌려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물 한잔 달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