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일행이 소아시아 이고니온 지방에서 선교할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바울이 어려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게 되었는데, 소문은 삽시에 온 도시에 퍼지게 됩니다. 제우스신당의 제사장도 소문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제우스의 현신이라며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도 여러분과 꼭 같은 사람입니다”라며 바울과 바나바는 가까스로 말립니다(행 14:15-17).

당시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라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소문은 다중을 통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간의 관심에 목매는 사람들은 사건이나 사고 혹은 사회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인기에 영합하려는 언론인들, 유사학자들, 대박을 터트리고 싶은 사람들, 심지어 종교지도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별의별 혐오스러운 일까지 가공해서 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과장되게 노출된 사건이나 조작된 이미지만을 추종하다 보면 ‘시간의 역사’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가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백성들을 위해서 지어 부르게 한 노래가 있습니다(신 32장).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어 가나안에 이르게 됐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노래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를 평안하게 하고,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합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의 쓰라림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증오심으로만 기억한다면 고통의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북핵으로 인한 전쟁의 불안은 동족상잔의 쓰라린 역사를 증오심으로만 기억한 업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 동안 진정으로 북한과 화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화해하려는 시도들을 극렬하게 매도 · 탄압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만 밀어 넣으려 한 것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북이 핵을 개발할 빌미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서 이제 와서는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북의 핵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매번 정권이 바뀌어도 역사청산을 못하고 제 자리를 맴도는 것도 실은 역사를 은총이 아닌 증오심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늘 간악한 자들의 음모와 조작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쥐면 ‘역사바로세우기’로, 권력을 잃으며 증오심프레임으로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하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은총으로 기억한다고 해서 죄악을 품고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죄악은 청산하고, 은총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역설의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야 자기 죄과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악은 결코 은총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권력의 사유화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은 매 시대마다 적폐 청산의 요구를 정의의 회복이 아닌 ‘정치보복’으로 둔갑시켜왔습니다. 그들은 권력의 쟁취 혹은 탈취하는 일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그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 선량한 백성들은 피눈물을 쏟았지만, 그들은 출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해방정국에서 일제에 충성한 자들은 또 다시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렇게 매 시대마다 권력을 사유화한 자들의 패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 ‘갑질’도 그중 하나입니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제1과제는 사유화된 권력을 공동체의 것으로 돌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아야 할 백성들에게 부르게 했던 모세의 노래가 지향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거친 환경에서 증오심으로 파편화되기 쉬운 삶을 공동체의 지혜로 수렴하기 위해서입니다. 쓰라린 역사를 증오심이 아닌 은총으로 수렴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약속받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