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정국에서도 가을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온 세계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재난으로 혼돈스런 날들을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신명기에, 모세 말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백성들을 위해서 지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라”
(신 32:7)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가나안은 풍요의 신 바알의 유혹이 집요한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바알은 날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입니다. 그렇게 바알이 백성들의 정신을 홀치는 땅에서 모세의 노래는 지난날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됐는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특별히 지난날을 잊지 말라는 것은 살아오면서 겪은 고생담을 되 뇌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알의 기적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의 쓰라림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증오심으로만 기억한다면 참혹한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고난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역사가 꼬이게 된 것은 바로 당연히 이뤄져야 할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 중심에는 늘 불의를 행한 자들의 집요한 ‘역사 물 타기’가 있습니다. ‘그 시대에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자신들의 죄악을 희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행한 불의가 드러나는 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한편에서는 ‘역사바로세우기’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증오심프레임으로 자신을 위장합니다.

하지만 삶을 은총으로 기억한다고 해서 저지른 죄악을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죄악은 청산하고, 은총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야 자기 죄과를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악은 결코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닙니다. 대의명분을 앞세운 기만일 뿐입니다. 그들은 기득권 보호와 권력의 사유화를 위한 일이라면 그 집요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습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그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 선량한 백성들은 피눈물을 쏟았지만, 그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일제에 충성한 자들은 해방정국에서 또 다시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춤을 췄습니다. 민주화 시대가 되자 어느새 민주주의 화신이 되어 민주적인 제도를 자신들의 죄악을 은폐하는 견고한 갑옷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게 변신의 화신인 이들의 패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대한민국 정치의 난맥상은 변신 귀재들의 집요한 농간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특권의식과 위선 그리고 몰염치가 날개를 달았습니다. 이들의 몰염치한 행위들은 공정사회는 고사하고 대한민국의 희망을 갉아먹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아야 할 백성들에게 부르게 했던 모세의 노래가 지향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거친 환경에서 파편화되기 쉬운 삶을 공동체의 정신으로 수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증오가 아닌 은총으로 수렴함으로써 미래를 약속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신명기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의 역경과 기회, 날마다 먹는 음식, 필요한 물질 등 모든 것들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고백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개별적이 아닌 공동체로 고백하라고 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의 의지를 강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도 자기 속의 생각과 의지를 스스로 강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찬양을 스스로 강제할 때에만, 인간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삶을 은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평안하게 하고,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