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이곳에 오는 도중에 한 스님을 만났단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를 만드는 분이야. 그 스님이 만들고 있는 종이는 ‘닥종이’였다.
닥종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닥풀을 만들기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그 뿌리를 캐고, 캔 뿌리를 말렸다가 으깨서 온종일 밝고 있었다. 이렇게 닥풀을 만들어 놓고, 닥나무 껍질을 벗긴다. 벗긴 닥나무 껍질을 삶고, 그것을 씻고, 티를 고르고, 두드리고 빻은 데다 닥풀을 섞는다. 그래서 종이를 뜨고 있었다. 뜬 종이를 말리고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셨어.
“이렇게 한 장의 종이를 만들기까지, 사람의 손을 아흔 아홉번이나 거치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종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백번째 만지게 되는 게야. 그래서 종이 이름도 백지(白紙)라는 게야.”
그래. 천자문(千字文)을 짓는 동안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고 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고 부르듯이.
그래. 닥종이를 만들듯이 정성이 들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진 것이어야 수명도 길지. 펄프로 만든 요즘의 종이 수명이 백 년 정도인 데 비하여, 우리나라 전통 한지는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단다.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을 아오? 이 종이가 바로 그 두 책을 영인할 종이요. 그렇지만 영인본은 어디까지나 영인본이지 진본은 아니란 말씀야.”
스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그래, ‘직지심경’이나 ‘왕오천축국전’뿐만 아니라, 일본에 가 있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 생각하면, 삼촌은 부끄럽다. 아니 우리 어른들은 모두 부끄럽단다. 어른들의 희망은 자라나는 너희들에게 있단다. 거짓없이, 그리고 튼튼하게 자라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조카 경일아, 그리고 경완아.
그래, 삼촌의 희망도 너희들에게 있단다. 씩씩하게, 당당하게 자라야 한다. 언젠가 다시 별나라에서 긴 편지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안녕.

첫눈이 내리던 날, 민영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향이 뭔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만 고향을 알아.”
밤샘을 하고, 장지까지 다녀오신 아빠가 말씀하셨다.
“당신은 고향을 몰라요? 당신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잖아요?”
엄마가 아빠를 바라보셨다.
“그렇지만 우리네 모두 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지. 민영이 할아버지처럼 이북에 고향을 두고 가지 못해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분은 차라리 행복한 분이야. 항상 고향 생각하시다가 결국은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셨으니까. 우리네는 아예 있는 고향까지 잊어버리고 사는 것까지 잊어버리고 있거든.”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애들 삼촌이 행복하군요. 항상 무엇을 찾고 있잖아요?”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 애는 앓고 있지. 그 애는 나보다 낫지.”
아빠가 말씀하셨다.
“당신도 찾아 다니시잖아요?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서, 항상 집을 비우시고, 여행을 하시잖아요? 당신도 앓고 있는거예요?”
엄마가 말씀하셨다.
“어른들은 뭐가 그렇게 복잡해? 어린아이 같아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잖아?”
경일이가 말했다.
“그래 엄마, 나 핫도그 사 먹을래. 그리구 겨울방학 땐 할아버지 댁에 가면 되잖아? 거기가 아빠 고향이잖아?”
경완이가 말했다.
“또 동전을 삼키는 거 아니니?”
경일이가 말했다.
“한 번 삼키면 됐지 뭐.”
경완이가 대꾸했다.
“그렇다. 우리네 어른들은 너무 복잡하다. 너희들이야말로 하늘 나라 백성이다. 우리네 어른들의 희망은 너희들에게 있단다. 거짓없이, 당당하게 자라야 된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삼촌 편지에 쓴 얘기하고 아빠 얘기하고 똑같은 얘긴데?”
경일이가 말했다.
“다 같은 장씨네 집안 사람들이지 않니?”
엄마가 웃으셨다.
경완이는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에다 동그라미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겨울방학을 꼽아보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