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성서연구


	4/2005	목차 (2005년 4월호, 제110호) :햇순:을 읽고.. 편지로 띄우는 말씀 / 공동체성서연구자료 / 성서난해구 해설 / 공동체만들기 오늘을 바라보며 / 말씀과 삶의 뜨락 / 현장의 소리 / 강정규 연재동화 영성생활에 도움되는 책 / 에니어그램영성 / 공동체소식 / 공동체 이야기

강정규 연재동화

언년이 할아버지 (2)

강 정 규

동화작가, 크리스찬 신문사 부사장 지냄, 지금은 "시와 동화" 발행인이며 단국대 초빙교수임.

“점심 먹자꾸나.”
콩밭을 매던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리곤 콩밭 사이사이 심었던 상추랑 쑥갓을 뽑아 들고 개울가로 갔어요.
“가재다!”
언년이가 소리쳤어요.
할아버지가 돌을 들추고 도망가는 가재 두 마리를 잡아 주었어요.
“가지구 놀다 놓아 주렴.”
“응.”
잣나무가 짙푸른 건넛산에서 뻐꾸기가 울었어요. 할아버지와 언년이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점심밥을 먹었어요. 상추랑 쑥갓 위에 잡곡밥을 놓고, 호박잎에 담아 온 된장을 발라 꼭꼭 씹어 먹었어요.
“한숨 자거라.”
언년이를 그늘에 눕히고, 할아버지는 구럭에 담아 온 나무 토막을 꺼냈어요.

할아버지는 항상 노는 듯 즐겁게 일을 하지요.
나무를 깎고 다듬어 책상이며 걸상, 필통 따위 간단한 가구와 도구를 만들어요. 깎고 다듬는다고 해도 제 모습을 살리는 길을 찾아 가능한 한 손을 덜 대지요. 그렇게 만든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세상사는 즐거움 중 하나래요.
“나무로 만든 물건을 가까이 두고 쓰면, 그 나무한테서 영이 옮겨 와, 나무가 가진 좋은 것들을 조금씩이나마 가지게 돼요. 나무도 사람과 같이 영혼이 있다고 봐요. 고작 육칠십 년밖에 못 사는 사람한테도 영혼이 있는데 어찌 천 년을 너끈히 사는 나무한테 그것이 없겠어요?”
한때 할아버지도 자리 짜는 일을 열심히 했대요.
새와 부들, 왕골과 칡으로 짠 자리를 깔고 살면 거기서도 좋은 기운이 사람에게 옯겨 온대요. 비닐이나 종이장판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대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스스로 짠 자리나 필통, 책상이나 토막 또는 농사지은 율무나 콩, 팥이나 수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것을 좋아해요.
때로는 그것들을 들고 지고 서울로, 광주로, 해남으로 제천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다녀요. 찾아가면 잠도 재워 주고 밥도 거저 준다나요.
이렇게 말할 때는 웃으며 말하지만, ‘만나면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할 때는 정색을 하고 말해요.
그렇게 떠날 때면 집은 그냥 비워 둔 채지요. 문 밖엔 이런 쪽지를 붙여 두지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무는 느티나무, 소나무, 대추나무인데, 그 중에서도 느티나무를 제일 좋아해요.
“죽으면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고 싶구나. 고단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온갖 새들이 날아와 노래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되고 싶어. 허긴 그것도 욕심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아빠가 언년이를 데리고 왔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언년이는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해요. 그래서 아빠가 자주 데려다 놓지요.
언년이네 아빠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에요. 애초엔 언년이 이름이 ‘평화’였대요. 그것을 할아버지가 너무 거창하다고, 그냥 언년이라 하라 해서 언년이가 됐대요.
처음엔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 싫었는데 자꾸 들으니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니까요.
“깼구나, 실컷 잤느냐?”
필통을 깎고 있던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눈이 부셨어요.
해가 좀 기울고, 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가지 끝의 나뭇잎을 마구 흔들고 있었어요.
“하부지, 나뭇잎이 막 웃어!”
언년이가 말했어요.
“그렇구나. 네 말대로 느티나무 잎새가 까르르 웃는구나. 바람이 간지럼을 태우나 부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언년이 할아버지는 나무 같은 사람이지요.
“내 죽거들랑 뒷산에 묻고, 무덤 대신 느티나무를 한 그루 심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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