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아나운서’는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에 속하여 뉴스 등을 고지 전달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사람 또는 그 직업’을 가리킨다. 그런데 최근 방송을 보면 아나운서들이 뉴스 전달자나 시사성 있는 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로서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깨고, 각종 쇼ㆍ오락 프로그램은 물론이요, 드라마와 코미디에까지 진출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같은 아나운서라고 해도, 오락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다소 예외적인 혹은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주로 젊은 여성 쪽이지, 나이 지긋한 남성 쪽이 아니라는 데 어쩐지 석연찮은 냄새가 난다. 미모의 젊은 여자 아나운서들은, 설령 그가 뉴스 진행자(앵커우먼)라고 해도, 본연의 임무에서 살짝 옆으로 비켜 나가면, 가끔씩 ‘야한’ 화장과 ‘도발적인’ 옷차림을 선보여 언론의 집중포화와 누리꾼들의 찬반격론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반면에 내 기억으로는, 상대적으로 세월의 무게가 배어나는 남자 아나운서, 그것도 공영방송의 간판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외모나 치장 문제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보태자면, 사실 내 눈에는 앵커와 앵커우먼 사이의 나이 차이도 종종 거슬린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펄펄 살아 역사하는 이 동토의 제국에도 ‘연상 여자-연하 남자’ 커플이 대유행처럼 번지는 현실인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 뉴스 진행 커플은 ‘연상 남자-연하 여자’의 공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다. 앵커우먼을 몇 번째 갈아치우는 동안에도 앵커는 그대로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앵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경력과 신뢰성이 함께 쌓여가지만, 앵커우먼은 정반대라는 통념을 생산하고 강화시키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나는 여자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깊이 있게 닦아 나가기도 전에 몸을 상품화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만 신경 쓰도록 부추기는 방송가의 천박한 물신숭배 풍조가 안타까운 것이다. 한마디로 여자 아나운서의 세계는 아나운서로서의 기본 조건 위에다가 여자로서의 프리미엄, 곧 예쁘고 날씬할 것까지 요구되는 이중 스트레스의 현장이다.

그런 연장선상에 이금희 아나운서의 외모 논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금희 아나운서는 TV에서 <아침마당>의 안주인으로, <인간극장>과 등의 내레이터로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발산하면서 여자 아나운서의 위상을 세워주고 있는 귀한 존재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넉넉함과 따뜻함, 촉촉함과 순수함 등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 게다가 나이 먹은 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의 몸에서는 정직함과 자유로움, 평화로움과 자연스러움이 느껴져서 좋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중독된 몸들이 넘쳐나는 TV에서 그가 당당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새삼 아름답다고 느껴지던 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 방송국의 퀴즈 프로그램을 맡게 되자, 누리꾼들 사이에 희한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뚱뚱한 아나운서는 프로 근성이 없다.” “방송인으로서 자기관리를 하지 않은 몸매가 부담스럽다.” “외모에 대한 자기관리 부족은 공인으로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등 대놓고 그를 비난하는 언어폭력이 난무했다. 아나운서고 뭐고, 일단 여자는 ‘보여주기 위한’ 몸을 가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가 없다는 식이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 중의 하나인 외모지상주의와 그 이면에 깔린 성차별주의는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한 유능한 여자 아나운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방송인의 외모 논란이 특히 여성에게 집중되는 것은 가부장적 시스템 속에서 어쩌면 자명한 일일 것이다. 남성 진행자에게는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노련한 말솜씨와 어떤 개성 있는 카리스마 같은 것이 요구되지만, 여성 진행자에게는 주로 맞장구를 친다거나 멍청한 질문을 던져 웃음을 유도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업’시키는 보조 역할만이 주어지는 게 방송의 현실이다. 가급적 몸을 드러내는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남성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도 여성 진행자가 할 일이다. 그러니 그러한 시스템에 길들여있는 사람들의 입맛에는 이금희가 껄끄러울 수밖에.

‘실력 있는 남성 전문가 옆에(혹은 아래에) 인형처럼 웃고 서 있는 여성 들러리’의 구도가 바뀌지 않고서는, 이금희의 수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직업상 필수적인 업무능력 이외에 소위 ‘용모단정’이 기대되고 강요되는 한, 제2ㆍ제3의 이금희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금희의 외모에 대해 시비 거는 님들이여, 그를 그냥 내버려두시라! 그의 존재는 우리나라 방송이 그렇게 구제불능이지만은 않다는 신호이므로... 그리고 직업세계에서 실력보다는 외모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가부장적인 폭력도 없으므로...

시청자와 더불어 나이를 먹고, 세월 따라 늙어가면서도 여전히 데스크와 마이크를 지키는 여자 아나운서를 보는 일은 분명 우리의 왜곡된 성 편견을 치유하는 행복한 경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전설적인 여자 아나운서로, 73세에 은퇴하기까지 ‘최초의 앵커우먼ㆍ최고의 인터뷰어’라는 수식어를 늘 달고 다녔던 바바라 월터스(Barbara Walters)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뉴스 작가에서 출발하여 오직 실력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고, 여성 특유의 섬세한 매너와 일에 대한 열정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버텨낸 그는 오늘날 수많은 여자 아나운서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역할 모델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청자로서,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땅의 여자 아나운서들이 마음껏 제 기량을 펼치며 끝까지 전문인으로 살아남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아닐까?

시몬느 드 보봐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여자는 본래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그가 몸담고 사는 가부장적 사회의 기준에 따라 여자답게 살게끔 길들여져서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그 명제를 나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패러디하고 싶다. 바바라 월터스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외모가 아니라 일 자체에 승부를 걸려는 본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세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격려하며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어야지만 바바라 월터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여자 아나운서를 키워낼 우리의 내적 역량이 아쉬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