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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며칠째 내린 눈이 쌓여 있었고,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바구니를 들고 엿도가집으로 갔다.
“오, 이 녀석 또 왔구나. 먹을 거냐, 떼다 팔거냐?”
곰보 아저씨가 말했다.
“떼다 팔 거예요, 백 원 어치요.”
내가 말했다.
“자, 바구니 다오. 굵은 것 열다섯 가락, 그리고 덤으로 잔 가락 다섯 개!”
곰보 아저씨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거기 방앗간집 막내아들이 서 있었다. 그 아이도 대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다가 들킨 것같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장날 오후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지나갔다. 백 원어치 새로 받아 온 엿을 몇 가락 팔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이도 대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가 빙긋이 웃었던 것이다. 나는 엿바구니를 들고 뛰어서 목로집 처마 밑으로 왔다. 뛰어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도 하였다.

나는 목로집 처마 밑에 엿바구니를 놓고 앉았다. 날이 궂은 날은 궂은 날대로 목로집에 술꾼들이 북적거리고, 그러다 보면 술김에 집에 돌아가다가 엿을 사 가는 이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런데 뒤이어 방앗간집 막내아들이 엿이 담긴 대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 아이는 내 곁에 와 앉으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엿바구니를 들고 비켜 앉았다. 그 아이는 목로집의 처마 밑 햇빛 잘 드는 ‘명당자리’에 엿바구니를 놓고 버티어 앉았다. 그 자리는 ‘길산옥’이라는 목로집 간판이 바람을 막아 주는 곳이었고, 비가 내릴 때면 장꾼들이 비를 피했다 가는 곳이었다.
“엿 세 가락만 싸다구!”
그 아이는 앉자마자 엿 세 가락을 팔았다.
“아저씨, 이건 덤이구요!”
그 아이는 한 술 더 떠 굵은 가래엿 세 가락을 신문지에 말며 잔가락 한 개를 얹어 덤까지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 원짜리 석 장을 받더니 ‘마수거리 자알 된다.’면서 침을 탁 뱉아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녀석, 제법인데?”
엿을 만 신문지를 받아든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야말로 ‘마수거리’부터 기가 죽었던 것이다
“얌마, 너 나한테꺼정 돈을 무지 남기고 엿을 팔았더구나. 친구끼리 그럴 수 있는 거니?”
방앗간집 막내아들이 말했다.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빙 둘러서 있는 가운데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야, 너희들 좀 비켜! 손님들이 그냥 지나가겠다.”
그 아이는 호기 있게 소리쳤다. 그 아이는 털외투를 입고 토끼털 귀싸개까지 매고 있었다. 나는 추웠다.
“너희들 말야, 양잿물이나 만들며 놀아. 이 엿 팔아 돈 벌면 플래시 사서 저녁에 새 잡아 구워 먹는 거야, 알았냐?”
그 아이는 가래엿 한 가락을 뚝뚝 잘라 나눠 먹으며 떠들었다. 내 엿은 팔리지 않았고, 그 아이 엿만 팔렸다. 플래시 사서 새 잡을 그 아이 엿은 팔리고 책 사서 할머니 읽어 드릴 내 엿은 팔리지 않았다. ‘집에서 먹을 거냐, 떼다 팔 거냐?’고 곰보 아저씨가 물었을 때, 팔 거라고 대답해서 덤까지 똑같이 얻어 온 그 애가 미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남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더욱 춥기만 했다.
그 아이는 엿도가집엘 한 차례 더 다녀왔고, 해가 아직 한 발도 넘게 남았을 때 손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플래시를 사러 달려갔다. 나는 해 저물 때까지 앉아 있었지만 굵은 것 세 가락과 덤으로 받아 온 일 원짜리 두 가락을 팔아 삼 십 이 원을 건졌을 뿐이었다.
“아가, 인제 들어가자!”
할머니가 떡소쿠리를 이고 오셨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웬일인지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꾸도 못한 채 엿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그 날 밤 나는 몹시 앓았다.
‘날씨도 궂은디 하루 종일 떨고 앉았니라고 고뿔이 들었구나. 고뿔에는 그저 땀내고 쉬는 수배끼 없니라.“
할머니는 그날 밤 콩나물국을 끓여 주시고, 군불을 많이 때셨다. 그리고는 여전히 밤늦도록 인절미를 만드셨다.
나는 이불을 쓰고도 벌벌 떨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B-29폭격이 있던 날, 양식을 구하러 나가신 엄마와 아빠는 밤늦도록 돌아오시지 않았고, 이튿날 다리 건너 콩밭에서 피를 흘리다 돌아가신 두 분 시체를 발견했을 때, 할머니가 기절해 쓰러지던 꿈이었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부터 부르며 손을 허우적대다가 잠이 깼다. 할머니는 내 곁에 누워계셨다. 하루 종일 떡 팔러 돌아다니고, 밤늦도록 떡을 만드시고는 곤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안심이 됐다. 땀을 흘리며 한숨 자고나니 한결 나았다. 엿바구니도 떡바구니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할머니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잠을 청했다. 잠결에 할머니 손이 내 등을 쓸어 주셨다.
이튿날 나는 늦잠을 잤던 모양이다. 뒤늦게 일어났을 대 머리맡엔 엿바구니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내 엿!”
내가 부엌을 내다보며 말했다.
“밤새 녹아서 한데 다 붙어 있는 것 장꽝에 내놨니라. 얼걸랑 우리 둘이 깨 먹구 말자, 그리구 다실랑 엿장사 할 생각 말그라…….”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
“오냐, 내 다 안다. 늬는 낭중에 성공혀서 훌륭한 사람 되거들랑 남의 가슴 아푸게 허는 일 허지 말그라, 내 말 알아듣겄느냐 아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