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이 가까운 서해 외딴 섬. 이날 부두에 내린 사람들은 거의가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할 큰아버지들이었습니다. 배는 잠시 섰다가 다른 섬으로 떠나고,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차를 가져온 사람, 가족과 함께 온 사람, 혼자서 술병 하나 달랑 들고 온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어울렸습니다. 악수를 나누고 농을 주고받고 얼싸안고 등을 두들기기도 하고 초면인데도 내게 꿀밤을 먹이는 큰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아들딸들이 장성하여 뜻 모아 장학회를 만들자 할아버지는 서울 집과 작품들을 모두 정리하여 장학기금에 보태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홀몸으로 말년을 보내셨답니다.
섬마을 삼간초옥이 일 년 만에 다시 떠들썩해졌습니다. 각자 마련해온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가스렌지며 그릇들까지 이 차 저 차에서 나왔습니다. 조립하여 세울 수 있는 제사상까지 가져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후 나는 겉껍질 벗겨 물에 담갔던 밤을 정성껏 깎았습니다. 물에 불린 밤을 북 모양으로 깎는 일을 어른들은 ‘친다’고 말합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잡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밤을 치고, 둘러앉은 어른들은 장학회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해던가, 통금이 있던 때였어. 전시회 준비로 우리들이 여관에 들었지. 선생님과 새벽에 여관을 나섰는데, 건널목에 당도하니 빨간 불이라.
-선생님께서 멈춰 섰어. 우리도 그 자리에 멈춰 섰지. 빨간불이니까 당연지사지. 십일월인가 십이월인가, 여하튼 새벽바람이 몹시 찼어. 거리엔 차는 물론 사람도 없었어. 그런데 빨간불이 꺼지질 않아. 신호등이 고장 난 거라.
-우리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건널목을 건넜지. 그런데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어.
-그 때 저 아래쪽으로,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날리는, 가로등 밑을 걸어가시는 선생님 뒷모습이 보였어. 그리고, 고장 나지 않은 신호등이 있는 그 아래쪽 건널목에서, 한참 기다려 파란불이 들어오자 길을 건너고, 옹기종기 모여 떨고 서있는 우리들 곁으로 천천히 걸어오셨어….
-그리구 또 있어. 미국에 가 있는 그 친구, 물리학박산가 생물학박산가 하는 친구 있지? 그 친구가 어느 해 선생님을 찾아 왔어. 모처럼 무슨 학술회의 참석차 서울에 왔다가 선생님을 뵙구, 이렇게 저렇게 북에 계신 사모님과 연락이 닿을 것 같다며, 평양의 선생님 고향집 주소와 자녀들 이름을 여쭤봤다는구먼.
-그 얘기 나두 아네. …깍지 낀 손마디만 옥죄이며 한참이나 뜸들이다가, 선생님께서 겨우 하신 말씀이, 그런 사람 어디 한 둘이냐며, 소식 몰라 애태우는 사람이 이강산 어디 나뿐이겠냐면서, 자네들 이렇게 다 잘 됐으니 그곳 가족들도 다 잘들 있을 것이라며 끝내 다른 말씀 하지 않으셨다지, 아마?
-그리구, 나오다 봉께, 왼손 무명지에 끼운 구리반지를 바른 손으로 자꾸 쓰다듬구 계셨대잖여…….
-그 후, 여기 오셔서 마지막으로 그리신 게 저 그림이라네.
밤을 치다가, 나는 벽에 걸린 그림을 다시 쳐다보았죠. 흙담 초가, 마당가에 선 감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끝까지에 홍시 몇 개 달고 있고, 반이나 기운 사립문 옆으로 수건을 쓰고, 한 손에 호미 든 아낙네가 검정고무신 신고 서있습니다. 그 그림 속의 아낙네를 나는 본 적이 있지요. 그것은 어쩌면 행운이었고, 나만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할아버지가 널 찾으셔.”
수업 중인데, 어머니가 차를 타고 오셔서 날 불러냈습니다. 섬에서 급히 모셔왔다는 할아버지는 대학병원 침대에 누워계셨습니다. 그리고 침대 주위엔 큰아버지들이 둘러 서 있고, 그 가운데 아버지도 계셨어요.
“아버님, 우리 애가 왔어요.”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다 할아버지 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말이 없었습니다. 수건으로 입을 막거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지요.
“그래? 그럼, 가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 선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은 채, 바람같이 병실을 나섰어요.
“늬 애비, 발이 한 쪽 성치 못해 늘상 내 맘이 아팠니라. …북에 두고 온 놈도 왼쪽 발이 그랬는데… 몸이 성해야 쓰는디… 늬라도 성한 발로 걸으니 참 다행이구나.”
할아버지는 어느새 날 등에 업고, 한 손으로 내 발을 연방 쓰다듬으며,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고, 나는 듯이 산을 넘어 낯선 바닷가 초가집 앞에 당도했어요. …거기 그 아낙네가 감나무 밑에 그림같이 서 있었습니다.
“내 항상 당신과 같이 있었는데, …내 먼저 길을 떠나니, …더 기다리덜랑 말고, …인자, 내가 가서 기다릴 차례이니 … 천천히 오우다.”
할아버지가 구리반지를 한 짝 빼내 아낙네 손가락에 끼워주고, 어느새 할아버지는 내 등에 가벼이 업히고, 나는, 나는 듯이 내를 건너고, 나는 듯이 들판을 지나 산을 넘고 바다를 걸어서 건너, 이곳 서해바다 외딴 섬 삼간초옥에 도착했지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나는 다시 병실로 혼자 들어서고 있고, 할아버지는 아까모양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계신데, 갑자기 어른들이 아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인자 제사를 모셔야 되것네.”
부두에서 꿀밤 주던 큰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 때,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나섰어요.
“사모님 돌아가셨다는 소식 풍설에 듣고 나서야 뒤늦게 선생님 영정을 손댔지요.….”
아버지가 두루마리를 펴자, 거기 할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낙네 그림 옆에 할아버지를 나란히 걸었습니다. 그러자, 먹으로 그린 아낙네의 곱상한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카락까지 갑자기 희어지는가 싶더니 웃음빛을 띄우고, 할아버지 역시 주름살이 움직이면서 빙긋이 웃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지방이 모셔지고 두 개의 술잔 사이, 제기 위에 받쳐 놓은 외짝 구리반지가 촛불 빛에 반짝, 빛을 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