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지난해는 ‘다사다난’ 했다고 말한다. 의례히 하는 말이 아니다. 지난해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세계를 두루 살펴도 난민들이 갈 곳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떼죽음을 당한 해였다. 중동에서는 전쟁의 포화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갔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의한 ‘브렉시트 Brexit’도 지난해에 일어났고, ‘괴물’ 트럼프 Donald Trump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지난해였다. 인종ㆍ종교ㆍ이념 사이에 쳐 있는 높은 칸막이가 더 높이 올라가고, 편을 갈라 저주와 증오를 퍼 댄 것도 지난해였다.

이 땅은 어떠했나. 남북으로 갈라선 우리 겨레는 공존과 평화를 모색하기보다는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핵폭탄을 만들어 대며 엄청난 돈을 들여 무기들을 구입하기 바빴던 한 해였다. 여기저기 안전사고가 끊이질 않고 조류독감 AI으로 만 오천 마리의 오리와 닭들이 살처분을 당한 것도 지난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역사적인 사건은 이른바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이었다. 이상한 사람들이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출입하고, 대통령과 더불어 재벌들의 돈을 뜯어내며, 이런저런 국가사업에 손을 대고, 정부 인사에 관여했다. 그래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불안하고 또 분노하며 매주 ‘촛불’을 켜들고 토요집회를 열었다. 국회가 ‘촛불의 뜻’을 받들어 탄핵을 해도 이 사태의 주범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떵떵거리고 있다.

도무지 이 땅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씨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헬조선’을 절감케 하는 한 해였다. 힘 있는 사람들이 마구 ‘갑질’을 하며 ‘그들만의 세상’을 꾸려가는 모습에 넌더리가 났다. 뉴스를 통해 그들의 실체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절망의 한숨도 한 아름씩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를 보던 중에 이런 소식이 방송 자막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전남의 어느 행상 할머니가 평생 모은 8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쾌척했다는 것이다. 눈이 번쩍 떠졌다. 벌떡 일어나 누리집을 찾아봤다. 주인공은 서부덕 할머니. 먹고 사는 일에 쫓겨 한글을 떼지도 못한 게 한이 되어, 자기 같은 사람이 또 나오지 않도록 가난한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단다. 그래서 평생 보따리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모은 돈, 자신의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단다.

추운 날씨에도, 시국이 하수상한데도, 이에 아랑곳없이 구세군 자선냄비는 훈훈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수십, 수백만의 촛불시위대가 ‘비폭력ㆍ무사고’의 축제 한 마당을 펼치고 있어, 우리 겨레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세계인이 새삼 감탄하고 있다는 외신도 들린다. 이 ‘헬조선’에서 희망을 저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어둠이 짙었던 지난해 마지막 달, 우리 동네에서 우연히 어느 할아버지가 ‘꼬부랑’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 정말 허리가 굽은 할머니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허리가 더 꼬부라지지 않게 매일 산책을 시켜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섯 걸음도 채 못 가서 멈추어 쉬고, 또 다섯 걸음도 채 못 가서 멈추어 쉬고…. 노부부는 그렇게 오늘도 손을 잡은 채 골목을 걷는다. 느릿느릿 천천히, 뚜벅뚜벅 천천히….

희망은 그렇게 온다. 희망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자기 걸음을 늦출 때, 그 잡은 손 어디쯤에서 희망이 움튼다. 희망의 다른 이름은 ‘연대’인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햇순님들’께 간절히 소망한다. 새해에는 우리 햇순님들이 ‘손에 손잡고’ 희망의 씨앗을 심자. 더 나은 세상, 더 건강한 세상, 우리 모두 웃으며 사는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남몰래, 남보다 앞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척박한 세상에 누군가 심어놓은 씨앗에서 햇순이 돋아날 때 세상은 비로소 희망을 볼 것이다.

어김없이 새해다. 올해 새 희망을 파종하는 햇순님의 삶을 응원한다. 내가, 그대가 햇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