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통합 전국여교역자연합회에서 ‘소명의 올레길’이란 성소(하느님의 부르심) 식별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준비 과정에서 첸치니의 ‘부르심’이란 책을 함께 읽었다. 이 글에서 첸치니는 사계절처럼 교회도 풍요의 시기, 궁핍과 분별의 시기, 예언의 시기가 있으며 각각의 시기는 성소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잠시 내용을 살펴보면 풍요의 시기엔 성소신학의 부재가 특징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시기, 어떤 선교이든 어렵지 않게 많은 열매를 거두는 풍요의 시기엔 ‘성소’ 즉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궁핍의 때에 들어가면 교회는 자만심, 성취감, 도취감, 그리고 방향상실과 같은 것들을 정화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걷게 된다. 그리고 분별의 때를 맞으면서 개별 성소와 시대적 징표에 대한 식별, 사회변화에 대한 관심과 교회 선교의 내용이 다양해지고 교회의 카리스마도 새로워지기 시작한다. 성직에 속한 이들만의 성소가 아니라 평신도까지 확대된 다양한 부르심에 대한 관심도 함께 증폭된다. 당연히 성소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의 시기가 되면 교회의 성소에 대한 응답은 근본부터 새로워지고 활동과 실천에 있어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깊은 식별이 이루어지기에 교회 전체의 활동이 정확하게 자리를 잡게 되기 때문이다. 첸치니는 이를 예언의 시기라 이름하며, “희망을 품고 세상을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의 현존”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회복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소신학의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며 지금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궁핍과 분별의 때가 아닌지 여러 의견을 나눴다. 한 때 풍요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전의 성취감, 도취감을 정화하고 교회의 역할, 교회의 존재이유를 묻고 찾아야만 되는 때를 맞이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한국교회가 성숙해 가는 여정으로 이해하며 환영한다. 왜 신학교를 세우는지, 왜 더 큰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지, 왜 선교사를 파송하는지, 왜 더 많은 신학생들을 모집하는지, 그 어떠한 질문에 깊이와 책임, 신중한 응답을 내어놓지 못했던 한국교회였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성소를 발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상태에서 목회현장으로 내몰리고, 그마저 생활고라는 장벽에 부딪혀 생존의 방편으로 목회를 해야 했던 현실이다. 선교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했단 이야기를 우린 수도 없이 들었다. 시골에서 십 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는 한 여성목회자는 뭔가 첫출발부터 잘못되었다며 성소와 영신식별 등의 영성훈현의 부재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목회상황을 낳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나는 이제라도 한국교회, 한국신학교들이 성소신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를 바란다. 성소식별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함께 찾고 발견하는 여정”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성소식별이 어떤 직업이나 특정의 수단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을 본다. 목회지를 찾는다거나 목회대상을 찾는 등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성소식별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직업을, 어떤 자리를, 어떤 구체적 수단을 제시하시지 않는다. 성소라는 밑바탕에는 하느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아주 구체적인 확신, 또는 사명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하느님이 한국 교회를 부르신다는 그 확신과 그 자리를 찾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영적 작업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소식별은 이를 더 정화하고 깊어지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선적으로 이뤄질 때에만 다음 과정으로 현실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공동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나 종교단체의 성소에 대한 공동체적 식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화적, 역사적 상황 안에서 한 교회가 겪은 해방의 역사, 구원의 체험을 돌아보며 그곳에서 교회의 존재이유와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성소식별이 되지 않는 교회나 공동체, 개인은 언제나 미혹에 노출될 위험이 있으며 불필요한 여정, 심각한 오류와 실패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시대적으로 아주 어려운 때에 들어섰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 무엇인지, 한 걸음씩 성소식별의 여정을 충실히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