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 아주머니가 많이 추워졌다면서 내가 입은 옷이 너무 얇아 보인다고 걱정해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반팔 티에 점퍼를 걸치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씨는 생각지 않고. 하지만 집에 들어가 다시 갈아입고 나오기도 뭣해서 그냥 나와서 사무실에 앉아 있으려니 차가운 기온 때문인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린지 벌써 여러 해인데도 계절 감각에 무딘 것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냥 귀동냥한 소리라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버나드 쇼 묘비답다는 생각에 기억 속에 새겨져있습니다. 버나드 쇼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해마다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면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스산해지기도 합니다. 뭔가에 쫓기듯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 그런 반복된 일상이 목회현장에서도 끝을 맺어야 할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설레던 것은 곧 닥쳐올 새로운 해에는 뭔가 새로운 일들이, 멋진 일들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복된 설렘 속에서도 별로 달라진 것 없이 허둥대던 시간들이 떠오르면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치인 것 같아 마음이 스산해졌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러한 내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버나드 쇼를 흉내 내 “여기 우물쭈물 하다가 생을 마친 또 한사람이 있노라”고 묘비를 세워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빠르다’는 말이 무색하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목사들이 선각자 소리를 듣기도하고 교회가 사회를 선도해 간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를 선도하기는커녕 뒤꽁무니 따라가기도 버거워졌습니다. 목사들도 그저 ‘예전 禮典’ 집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격앙된 소리를 내도 아무도 사회문제에 관한한 목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성경 몇 구절은 해석(?)할 줄 알지만 급변하는 세상이 던져오는 질문에 합당한 답을 주지 못하고 놀란 토끼마냥 허둥대는 일이 다반사요, 겨우 한다는 소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방언만 두런거리다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벌써 단풍의 계절이 또 찾아왔습니다. 머지않아 교회력으로는 새해를 의미하는 강림절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좀 달라져서 제대로 생각하고 준비해서 새해를 맞고 싶습니다. 무작위로 던져지고 있는 질문에 제대로 준비해서 ‘추수하는 날에 냉수’같지는 못해도 나름 ‘고뇌한 모습’이라도 담긴 답을 내놓고 싶습니다.

탄핵으로 인한 정권교체와 함께 수면 위로 급격히 떠오른 차별금지법에서 시작된 논란이 이제는 아직 확정되지도 않는 개정 헌법 조문에까지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성소수자’문제에서 불거진 동성애문제, 폭력적(?) 이미지로 각인된 이슬람과 관련한 각종 논란들, 종교차별금지라는 법조항, 내년부터 시행되는 종교인 과세문제. 탈핵·원전, GMO식품문제와 같은 이슈들, 곧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을 거라는 인공지능. 어디 이뿐인가. 작게는 어느 교단에서 제기한 요가, 마술문제에서부터 예고 없이 찾아 올 각종 사건사고 등.

얼마 전 ‘종교개혁 500주년과 미래목회’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양희송 청어람 대표가 한 말이 오랫동안 머리를 맴돕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을 초청해 세월호사건을 주제로 집담회를 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허둥대며 제대로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인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평소엔 그렇게 당당하던 분들이! 내게는 그 분의 말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목사님들,
생각 좀 하고 삽시다! /
Cogito, ergo s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