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은 누구의 생에 있어서든 긴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보화 중에서 가장 만회할 수 없는 것이어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회고할 때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불안스럽게 된다. 헛되이 보낸 시간이란 우리들이 인간답게 살거나 경험을 쌓은 일도 없고, 배우거나 창조하는 일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던 시간을 말한다. 허비된 시간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시간이다.”

에버하르트 베트게 엮음,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선택이란 곧 포기를 의미한다. 하나를 선택하면 선택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선택 후에 늘 후회가 뒤따른다.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내 삶의 질은 달라졌을까? 행복의 밀도는 더 짙어졌을까? SNS상에서 읽게 되는 전문가들의 글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들의 내공에 질투도 느낀다. 질투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지금까지 뭘 한 거지. 20대 중반부터 쉬지 않고 해온 사역. 늘 바쁜 사역에 공부는 뒷전으로 밀렸다. 사역이 아닌 공부를 선택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40대 초반부터 마음에 간직한 아포리즘이 하나 있으니, 바로 마크 트웨인의 경구다.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돛 줄을 던져라.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항해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아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출처불명) 그의 말이 딱 맞았다. 지금 나는 하지 않았던 일로 더 실망하고 있다. 여태껏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지나 온 시간은 헛되이 흘려보낸 공허한 시간일까? 본회퍼는 “헛되이 보낸 시간이란 우리들이 인간답게 살거나 경험을 쌓은 일도 없고, 배우거나 창조하는 일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던 시간을 말”한다고 한다. 본회퍼의 말대로라면 내가 보낸 시간은 헛되고 공허한 시간은 아니었다.

목사가 되며 마음에 수놓은 다짐 하나는 목사 이전에 인간이 되자는 것이었다. 나는 줄기차게 상식이 통하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라는 제한된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 다양한 지체들과 쌓은 경험들과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며 경험한 일상들이 있다. 배움의 시간, 열정, 노력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애썼다. 고통스러운 일과 시간? 행복한 순간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왜? 헛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질투와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에버하르트 베트케는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모아 책으로 펴내며 서문 격으로 본회퍼의 <10년 후>라는 글을 실었다. 이는 몇몇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낸 글이었다. 히틀러 집권 10년 후 본회퍼 자신과 친구들의 상황과 저항운동에 관해 분석한 글이다. 본회퍼는 이 글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지난 10년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많은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가장 귀한 일이라 여겨 저항을 선택했고, 10년이 지났음에도 변화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지난 10년은 허비한 시간이 아니었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나 역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으니, 당시 전부라 여긴 것을 선택했고, 충실했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건만, 왜 이리 괴로운건가?

본회퍼는 계속해서 지난 10년의 모습을 톺아보고, 10년 후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누가 확고하게 설 것인가? 그것은 오직 인간의 이성, 인간의 원리, 인간의 양심, 인간의 덕을 궁극의 규범으로 하지 않고 신앙상 하나님과만 결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에게만 순종하고 책임 있는 행위를 하도록 부름을 받으며 그러한 것 일체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 그의 생이 하나님의 물음과 부름에 대한 답 이외의 것이기를 원치 않는 책임적인 인간뿐이다. 이러한 책임적인 인간은 어디에 있을까?”

그랬다. 방향성의 문제였다. 그동안 나의 삶은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물음과 부름에 대한 답이 되기 위해 살기보다는 나보다 앞선 이들,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의 성취를 보고 질투하고, 현재 나의 초라함을 괴로워했다. 그러니 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칼 융은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라고 했는데, 성취 하지 못하니 늘 조급했다. 리처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피상성의 특징이며 이를 탈피하기 원한다면 재창조의 침묵 속, 묵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본회퍼의 말대로라면 ‘책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지 않을까.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만 바라본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볼 때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과 파도를 볼 때 깊숙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동일하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조급함과 성취라는 마귀에게 미혹된다.

다시 주님 앞에 선다. 주님을 바라본다. 그럴 때 비로소 곁에 있는 벗들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지나 온 시간에 잃은 것은 많았지만 헛되이 흘려보낸 공허한 시간은 아니었다. 다시 주님 앞에 서게 되었으니. 나선 길이 사람들이 찾지 않는 뒤안길이라도 뜻매김 했으니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느긋하게 흥겹게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