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몇 컵 퍼야 되지?”
오늘 점심에 먹을 밥을 짓기로 한 아이. 밥통에서 내솥을 꺼내 들고 쌀포대 옆에 서서 묻습니다. 다른 아이가 와서
“네 컵 하면 될 걸?”

둘은 쌀을 퍼 담고 수돗가로 갑니다.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어 물을 틀고는, 배운 대로, 손으로 8자를 여러 번 그려가며 쌀을 씻습니다. 쌀뜨물은 옆에 가져다 둔 설거지통에 조심조심 붓습니다. 한꺼번에 쌀이 쑤욱 쓸려 내려가지 않게.

볍씨 아이들은 입학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일을 배우고, 일을 스스로 하기 시작합니다. 1학년 꼬맹이들도 함께 먹을 밥을 짓고, 친구들이 마실 물을 뜨고, 공동 그릇을 설거지하고, 우리들의 방을 쓸고 닦습니다. 처음 일을 배울 때면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일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나 언니들의 몸동작을 주의 깊게 바라봅니다. 설렘을 머금은 동글동글한 눈, 총기를 띤 이마. 일을 직접 해보면서 아이들은 신이 납니다. 아이들 손이 아직 여물지 않은 탓에 하고 싶어도 어른들이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이들이 늘 이런 마음을 유지하고 변함없이 일하며 흥을 느끼는 건 아니죠.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일이 즐거움보다는 의무와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가가고 어떻게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것인가에 치중하는 시기를 거치게도 됩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아이들은 날마다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 일하는 생활이 몸에 배입니다. 큰 아이들이 일할 때 보면 그래도 일꾼 냄새가 조금은 납니다.

볍씨에는 ‘살림’시간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인간을 포함한 생명들)를 살리고, 제대로 사는 길을 배우고, 살림의 지혜를 이어받는 시간입니다. 배움거리는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식’ ‘의’ ‘주’. 아이들은 작게나마 손수 농사짓고 요리하고, 천을 자연 염료로 물들이고 바느질,재봉틀질을 해서 소품을 제작하거나 옷을 짓고, 톱,망치,대패 같은 손연장이나 전동공구를 써서 가구를 만들거나 학교 곳곳을 수리하기도 합니다. 기술을 터득하고 능숙해지는 것보다는, 나 자신과 여러 가지 푸성귀들과 흙과 천과 나무들과 다양한 연장들과 작은 도구들을 존중하고 가장 그답게 살려내는 길을 찾길 바라며.

아이들은 거진 다 살림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살림 시간이 이렇게 인기 있는 까닭이 뭘까? 몸도 쓰고 마음도 들이고 지혜도 모아야 해서 힘이 많이 쓰이는 시간인데도. 해가 길어져서 열기가 쉽게 오르는 기간에도 땀방울 뚝뚝 떨어뜨려가며 톱질을 하고 자기가 만드는 것에 몰두하는 아이를 보면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아이들은 ‘살림’을 배우며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뭔가 완성되기까지 기다리는 법과 힘들고 고된 일을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공을 들이고 결과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에 맛을 들이기도 합니다.

배움의 알짬이 삶과 가까운 것일수록 그 속에 울림이 있고 실제 생활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지닙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생각 따로’여서는 도무지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살림’은 좋은 배움 활동입니다. 하지만 볍씨 아이들이 살림 활동만 하는 건 아닙니다. 볍씨에서도 말과 글, 수학, 과학, 사회와 같은 영역들을 다룹니다. 단 우리가 그것들을 배우는 목적은 분명히 하려 합니다.

‘OO을 왜 배우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지’라면, 그렇게 진정한 행복과는 무관한 미래상에 붙들려 자기 자신을 잃고 지식을 폭식하고 또 게워내며 지내야 한다면, 그런 걸 배움인 줄 오해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얼마나 갑갑하고 괴로울까! 글맛을 알고 글 안에 배인 삶의 소리를 듣기 전에 전문가들이 이미 분석하고 해체시켜 놓아서 박제된 문학작품을 만나야 하고, 원리와 이치를 이해하기 전에 수학 공식을 기계적으로 대입해가며 문제 풀이에 시달려야 하고, 사회 현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넓히고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앞서 시험에 나오는 용어들의 정의와 연대표를 외우고 또 외워야 하고,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전에 비대해진 머리만 이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나갈 것인가?’ ‘왜 그 내용과 과정과 방법을 선택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삶과 무관한 것이라면 과감히 그걸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우리한테 필요합니다.

에니어그램을 접하면서 누구나 처음에 부딪치는 물음은 ‘나는 몇 번 유형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유형을 찾고, 날개를 찾고, 그 유형의 특징들을 공부한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아, 나는 9번의 1번 날개이니까, 나는 이런 인성적 특성을 갖고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저렇게 행동해야겠구나. 나에게 맞는 직업은 아마도 ...일거야.’ 때로는 그 유형의 특징이 족집게 도사처럼 맞기도 하고, 몇몇 유형이 혼재해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며 헷갈리게 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의 성격유형을 분석하는 많은 이론들의 함정이 한 인간을 그 유형에 붙들어 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니어그램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이해되어왔다고 본다. 에니어그램을 공부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가 몇 번 유형인지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유형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에니어그램 몇 번 유형이라고 자기를 규정하는 한, 그 사람은 에니어그램을 통해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규정하는 그 성격유형은 실상은 나의 참 인성이 아니라 거짓 인성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9번에 1번 날개 유형이다. 그러나 이 9-1로 규정되는 나의 인성은 조작된 인성이다. 본래 하나의 온전한 인성을 가진 내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자꾸 분열되고 쪼개져 1/9로 줄어든 것이다. 8/9을 잃어버리고 1/9로 조작된 그 모습을 어찌 참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에니어그램에서 자기 유형을 발견한다는 것은 조작된 자기의 모습을 찾는 작업이다. 9-1의 격정은 나태-분노이다. 즉 나를 조작된 거짓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나태와 분노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나는 비로소 9-1의 조작에서 한걸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거짓에서 참으로의 이 과정은 조작된 자기를 깨닫는 회개의 과정이기도 하다.

대한에니어그램영성학회가 그 명칭에 ‘영성’이라는 말을 넣은 것은 창립취문의 첫 번째 이유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 에니어그램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훼손된 ‘에니어그램의 정통성’을 지켜 나가기 위한 것이다. 에니어그램의 정통성은 바로 ‘영성의 길’이다. 이 영성의 길은 구르지예프가 말한 ‘본성을 찾기 위한 수련인성’이기도 하다. 이 길은 초대 사막의 교부들이 행했던 정화-조명-일치의 영적 탐구과정과도 통하며, 하느님의 성품(본성, Nature of God)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벧후1,4)을 목표로 삼았던 동방교회의 영성의 길(신화, Theosis)과도 만난다. 에니어그램의 뿌리를 수피들과 그 이전의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영성의 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에니어그램영성학회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 영성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성실하게, 온전하고 성숙한 에니어그램 영성의 길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삶의 길이 증언되기를 희망한다. 2010년 8월 9일 대한에니어그램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Enneagram Manifesto를 기쁜 마음으로 나누고 싶다.

1. 우리는 인류를 위하여 산다.
2. 우리는 자기수련을 위하여 산다.
3. 우리는 아무것도 무리하지 않는다.
4. 우리는 매사를 스스로 검증한다.
5. 우리는 자기 관찰을 수행한다.
6. 우리는 자기 기억을 수행한다.
7.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집중한다.
8. 우리는 자발적 고난을 수련한다.
9. 우리는 진리추구와 사랑의 실천을 수행한다.
10. 우리는 통합, 통전, 통섭의 영성 문화를 창달시킨다.